정지된 낙원

마비노기 2차/밀레루에2022. 12. 25. 03:19





* * *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충돌음이 울렸다.

양손 둔기를 쓰는 그 밀레시안은 그 무기 자체의 무게와 충돌하는 양쪽의 힘을 함께 견디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는 그것을 웃도는 힘으로 찍어눌러 상대를 제압하기도 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자로써는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금 충돌했을 때 밀레시안, 아서의 무기가 저 멀리 날아갔다. 상대의 검술이 대하기 까다로워서인지, 그 잠깐 순간에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했었는지. 그 묵직한 철제 무기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순간 아서가 손에서 무기를 놓았다. 저 멀리 날아간 무기가 어딘가 충돌해 바윗덩어리 같은 것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하." 한숨 비슷한 것을 뱉는다. 그리고 맨몸으로 상대에게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구르고, 몇 번의 타격음이 이어졌다. 이내 루에리가 쥐었던 검도 그 손을 떠나 어딘가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손에서 무기를 잃은 둘은 그 흔한 마법이나 이름이 붙은 다른 기술들로 싸우는 대신 그저 맨몸으로 주먹을 주고받았다. 마치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 사이에 싸움이 터져 쥐어박는 것 같다가도, 그 무시무시한 힘으로 머리라도 깨어버릴 듯 처박거나 부러뜨릴 듯 힘을 주기도 했다. 엎치락뒤치락 싸우던 끝에 누군가가 우위를 선점한다. 붉은 눈과 붉은 머리를 가진 상대가 아서의 위에 올라타서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걸로 되겠어? 아주 죽이고 싶다며."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웃음기를 띠는 목소리로 아서가 말했다. 격렬한 싸움, 혹은 다툼. 혹은 목숨을 건 전투에 긴장된 숨소리가 걸린 채였지만, 동시에 여유로웠다. 죽지 않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

그 여유 때문인지, 도발하는 듯한 말 때문이었는지. 루에리의 손이 내려오려다 멈췄다. 그리고 대답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연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전에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던 것이 수없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고 싶었던 분노의 외침이 전부 터져 나오지 못한 것 같았는데. 막상 그 앞에서 무엇도 뱉을 수가 없다. 그 주먹이라도 다시금 내지르면 편해질까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도 없었다. 이 자는 그럴듯한 변명도 더한 도발도 해오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대신, 루에리가 잠시 망설이는 그 틈을 타 아서가 로브 자락을 쥐고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루에리의 몸을 힘으로 밀치고, 무게로 짓눌러 자세를 역전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어 웃는 눈꼬리가 루에리의 시선에서는 증오스럽기 그지없었다. 트리아나를, 리안을 앗아갔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나?

"자기야, 그렇게 방심하다가 네가 먼저 죽어.“
"나까지 죽이기라도 할 건가? 네가 죽인 다른 사람들처럼?"

그 말이 어떤 트리거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침묵이 감돈다. 하지만 그처럼 방심하지는 않았다. 흐릿한 색의 시선이 선명하기 그지없는 붉은 눈을 들여다보고, 어깨를 누르는 손에 우악스러운 힘이 실린다. 평범한 인간의 뼈 몇 마디, 목숨 하나 정도는 쉽사리 끊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다. 신성이나 마나를 쓰지 않아도, 오롯이 가진 힘만으로도 아서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일직선으로 흘러갔던 과거에서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상대였지만, 일곱 번의 밤을 넘고 시간을 넘나들 수 있게 된 지금의 아서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물리적으로. 또한, 정서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조건이 그러했다. "빌어먹을." 내가 죽이고 싶지 않았던 수많은 것 중에서 단 하나를 꼽아보라면, 그건 오로지 너였다고. 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아서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지자, 루에리가 입을 열었다.

"그걸로 되겠나?"
“…."
"아주 죽일 듯한 눈빛을 하고선."
"……그래, 이렇게는 안 되지."

아서는 표정을 지우려는 듯 잠시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떠올렸다. 눈가의 표정은 풀지 못해 일그러진 상태였지만,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려 웃는다. 그리고 짜내듯 말을 이었다.

"네가 다음엔 더 진심이었으면 좋겠으니까."

이미 충분히 진심이라는 대답이 들리기 전에, 아서의 손이 루에리의 턱을 잡았다. 어딘가 긴장감 어린 시선을 마주친 것은 아주 찰나였다. 어떤 생각이 끼어들 수도 없는 짧은 순간, 아서는 고개를 낮추고 잡은 손에 힘을 줘 들어 올리며 입술을 겹쳐왔다. 명확한 애정의 표현. 하지만 애정이 오가지 않는 관계에서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한 폭력이고, 도발일 뿐인.

"……!"

루에리가 강한 힘으로 그를 밀쳐냈다. 이어서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러 몇 차례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라는 듯, 아서는 맞을 때마다 몇 번의 신음을 뱉었을 뿐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맞고도 그 불멸자는 그저 입가에 흐른 피를 대충 닦아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서 "이제 좀 화났나 봐." 그랬다. 장난이라도 끝낸 듯이.

"이딴 걸 도발이라고."

루에리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불쾌하다는 듯 제 입가를 몇 번 문질러 닦았다. 침을 뱉기도 하고 그러고서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입가를 가렸다. 상대를 아무리 험악하게 노려본들, 그 밀레시안은 그저 웃을 뿐이다. 뻔뻔한 낯짝은 이후에도 그저 헛소리만을 늘어놓았다.

"그럼, 애정 표현이라고 할까?"
"이 자리에서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자기야."

그러나 의외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아서 자신에게는 자조에 가까웠다. 진지한 행동도 아니었고, 지나온 시간으로 굳이 돌아와서 그를 희롱하려고 작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작은 변덕. 본인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다만 이것은 이 시간대의 자신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무언가 변할 것이 분명했다. 뭐가 바뀔 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가 분노를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것이 역겨움과 혐오로 그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랐다. 그래서 정말 죽이는 데 성공이라도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몸을 일으키자 근처에 떨어진 검이 눈에 들어와 집어 들었다. 이전에 몇 번 루에리의 검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들어보았는데, 역시나 그 자신이 드는 것은 그보다 더 묵직했다. 그 손잡이를 잡으며 아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꿰뚫리는 상상을 한다. 몇 번이고 멈추고 소생하기를 반복했던 심장이, 그대로 모든 피를 쏟아내어 부활하지 않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검의 손잡이를 반만 잡아 손잡이 쪽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마치 대련이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어울리지도 않는 관계임에도.

루에리는 망설이다가 검의 손잡이를 잡는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지 못한 채, 그는 자기 생각을 했다. 그가 굳이 주워다 내어준 이 검을 잡고 휘둘러, 그를 죽이는 상상.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저 심장이 제 검이라고 순순히 멎어줄까. 검은 검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목적을 잊고 싸움을 하는 동안 날이 져 있었다. 그를 죽이면 모든 목적이 멎을까. 이 여정이 끝날 수 있을까. 이내 생각을 지웠다. 아서가 무기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 * *



비척비척 걷는 꼴이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다. 무기 모양의 풍선이라도 된 양 가뿐하게 들 때는 언제고, 이제는 질질 끌고 와 그 무게에 잔디가 팬 자국이 생긴다. 일곱 번째 밤을 넘어 신에게 도달한, 그 자신이 신이 되어버려 시간까지 뛰어넘은 어떤 존재가 고작 인간 하나와 주먹다짐을 한 끝에 꼴사나운 꼴이 된 것이다. 그의 업적을 반도 알지 못하는 루에리마저 할 말을 잃은 꼴이었다. 그 복잡한 표정의 루에리 앞으로 이내 아서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언제 주웠을지 모를 나무 장작을 근처에 와르르 쏟았다.

마나를 못 쓰는 게 아닌가 싶었던 아까의 전투 때와 달리 아서는 마나를 툭툭 떨궈 손쉽게 불을 피운다. 캠프파이어를 하기에 마땅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아까의 전투에 본능적으로 몸을 피한 몬스터나 짐승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온기가 피어오르자 부은 데가 더 아픈 것 같다고. 아서가 짧게 투덜거렸다.

"너 그 꼴로 이 밤에 더 돌아다닐 건 아니지?"
"딱히 네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래서 불 피웠잖아."

아서는 루에리에게 어디 가지 말고 이리 오라는 듯 눈짓했다. 양쪽 다 멀쩡한 꼴이 아니긴 마찬가지임을 루에리는 새삼 깨닫는다. 어째 무기를 들고 싸울 때보다 더 멀쩡한 곳이 없는 모양새였다. 맞고, 부딪히고, 찢어지거나 쓸린 자국들이 아려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아무 데나 굴러다니던 자신의 짐을 찾아와 근처에 앉았다. 감정의 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같은 불을 나누고서도 두 사람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그 불꽃을 사이에 두고 말없이 시간이 흐른다. 둘 중 누구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고, 할 이야기는 더욱 없었으며, 말을 뱉는다 한들 대화로 이어질 리가 만무했다. 각자의 별에서 와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생판 모르는 밀레시안들도 캠프파이어를 피우면 모여 말을 나누기 마련이었는데, 둘 사이에는 그저 인기척과 나무 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혈연보다도 질긴 게 악연이라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악연이라 여기지 않을 때는 그 어두운 감정의 끈조차 질기게 이어질 수가 없다. 이대로 놓아버리면 너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밀레시안과 마주치지 않는 시간대로 돌아가겠지. 우리의 시간은 영원히 부족한 채로 종극에 다다르고 말겠지. 아서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랬듯이.

"좀 도와줄까?"
"필요 없다."

루에리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그 말처럼, 상처 부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붕대를 두르는 손길이 능숙했다. 그 모습이 그가 얼마나 혼자 지내왔는지 짐작게 했다. 그렇게 혼자서 오래도록 트리아나를 찾아 헤매었을까. 트리아나를 찾을 수 없었던, 혹은 그 관을 찾았던 시간 동안 얼마나 큰 분노가 그 안에 들어앉았을까. 숲에 어둠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상념은 검게 탄 속으로 발을 디뎠다. 이번에는 말문이 막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외치던 이를 떠올린다. 그 순간이 그를 외로운 어둠 속으로 얼마나 깊이 밀어 넣었을까. 세 용사 중 유일하게 에린의 땅을 걸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 얼마나 혼자 걸어 다녔을까. 아서는 한참 동안 그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응급처치를 마친 루에리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게 눈을 마주하면, 그 눈가가 찌푸려졌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어쩐지 한숨 쉬는 것 같은 음성에, 아서는 습관처럼 소리 내 웃었다.

"알고 싶다는 뜻이지?"
"그럴 리가."
"난 네 생각밖에 안 하는데, 자기야."

못되게 드러냈던 애정이 진심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루에리는 안 그래도 펴지지 않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겨우 끌어낸 소강상태에서 다시 검을 들지 않은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 감정이 변색하지 않은 것도.

"너 먹을 것 좀 가진 거 있어?"

문득 아서가 루에리의 가방을 넘겨다보며 말했다. 식자재라면 그보다 자신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을 테지만, 그와는 달리 이 시간대의 그에게 모든 것이 궁금했기에. 그러자 루에리는 의외로 선뜻 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 주었다. 툭, 날아온 육포 조각을 받은 아서는…… 드디어, 정색했다. "너…."

"너 이런 거 먹고 다녀?"
"…?"
"아니…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것만 먹고 사냐?"
"안 먹을 거면 내놔."
"오늘도 이거 먹으려고? 안돼."
"하?"

언제 침울한 생각들에 잠겼냐는 듯이, 언제 조용했냐는 듯이. 아서가 갑자기 돌변이라도 한 것처럼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복수도 몸을 챙겨가면서 하는 거라고, 네 복수의 대상은 잘 먹고 잘사는데 이렇게 지내다간 오늘처럼 머리채 잡히는 수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잔소리 같은 이야기들에서 어딘지 모를 미안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눈치채지 않기를 내심 바랐지만, 듣는 루에리는 말 그대로 어이가 없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를 터였다.

표현 그대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잔소리가 이어지면서, 아서는 요리도구나 식자재를 꺼냈다. 금세 분주해진다. 루에리는 거기에 딴지를 걸 생각조차 못 하고 바라봤다. 미쳤다고 침 뱉고 가면 될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아마 이 제정신 아닌 밀레시안이 놔줄 리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 머리를 짚으면서도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그 끝에 손에 따듯한 그릇이 쥐어진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나는 고기 스튜였다.

"……."
"자, 봐. 나도 먹을게. 독 안 들었다. 그지?"
"네가 그런 짓까지 하지 않을 건 이미 알고 있거든…"
"그럼 먹어. 복수도 잘 먹어야 하지."

그야말로 복수의 대상에게서 들을 말은 아닌데. 하고 대꾸하는 대신 루에리는 식기를 들었다. 태평하게 짝이 없는 그 밀레시안은 한결같이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놈들도 이런가. 그렇다면 에린이 어딘가 잘못된 길로 가는 중인 것은 아닌가. 하지만 루에리는 순순히 스튜를 떠서 입에 넣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지만, 음식에 독을 넣었을 리도 만무했으므로.

루에리가 식기를 들자 아서는 그제야 제 몫을 챙기고 다시 앉았다. 음식을 하는 동안 약간 줄어든 불길 안으로 장작을 몇 개 던져넣는다. 음식이 들어가고, 장작이 타는 소리가 난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성큼 다가온다. 슬슬 익숙해질 법한 정적이었지만, 긴 잔소리가 지나간 후라서인지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그 어색한 사이로 밀레 시안의 시선이 비집고 들어왔다.

"좀 별로지?"

좀 예상 밖의 말이어서, 루에리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스튜를 한 입 더 떠먹는다. 요리는 나쁘지 않았다. 뛰어나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빈말로도 맛없다고는 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이렇게 황량한 평원에서 갑자기 먹은 음식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요리한 음식이었다. 만약 별로라고 해도 그렇게 느껴질 수가 없잖은가. 잠시 대답할 말을 고민하고 있자면, 답을 들으려는 질문은 아니었다는 듯이 아서는 말을 이었다.

"옛날에, 나를 만나기 전의 …옛 동료들이 꼭 네가 먹던 육포 같은 걸 먹고 다녔거든. 그걸 알고 내가 합류한 후로는 내가 계속 요리를 해 줬는데."
"..."
"어느 날은 걔내가 나한테 보답하겠다고 너구리를 잡아서 탕을 끓인 거야. 진짜, 그게 얼마나 맛이 없던지."

너구리가 불쌍할 정도였다며, 혼자 말을 늘어놓는 이는 그것이 꽤 좋은 추억이었던 것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문득 루에리는 그가 비로소 웃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곧이어 자연히 자신의 동료들과 불을 피웠던 그 오래전 여행이 떠오른다. 우리 중 누군가가 요리를 했던가. 그 캠프파이어에선 뭘 나누어 먹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가. 그 생각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동안 아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제 음식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추억에 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너무 좋았어."
"맛이 없었다며."
"그래도 좋았어, 그 애들을 좋아했으니까."
"..."

그래도 좋았다. 다시는 조우할 수 없는 자신의 오랜 기억이 떠올라 루에리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끝을 맞이할 줄 모르고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그저 철없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가 있었다.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희망. 그것이 산산이 부서질 때의 절망감을 떠올린다. 눈앞의 자가 저주스럽게 느껴지던 때로 생각이 이어졌는데, 루에리의 생각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한 아서는 여전히 이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겐 내가 해 준 게 맛없을까 봐."

순간, 그 끔찍한 시간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혹은 지금이 거짓이거나.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애써 속으로 밀어 넣는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쓰인 글자 위에 마구 선을 칠해 덮은 듯 생각을 덮었다. 그저 빈 그릇을 그에게 밀어 넘겨주고는 돌아앉았다.

"먼저 잔다."

아서는 그릇을 받아서 들고 정리했다. 다 비웠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나? 빈 그릇을 보며 다른 상념이 따라붙는 것을 조금 늦게 외면했다.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쉽게 잊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서와 루에리, 둘 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알고 있는 사실. 모든 것을 잃은 마음에 새겨진 것은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변하지 않는다. 덮는다고 덮이는 것이 아니다.

그게 저주든, 사랑이든 간에.

이 시간대로 돌아온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는가. 아서는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오늘도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아서는 자신이 곤경에 처했음을 알았다. 

어떤 방법으로도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막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 이상적인 엔딩을 맞는 것은 그가 언제나 해왔던 익숙한 일이다. 이번 목적은 그를 만나는 것, 조금이라도 시간을 갖는 것…이니 분명 목표는 이루어졌을 텐데. 심지어는 충분한 시간을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날이 밝고, 루에리가 인사도 없이 뒷모습을 보이며 떠난 뒤에도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 지지는 않았다. 분명히 온 생애에 반복해온 아주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어떻게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오를 찾아 연유를 물었으나 그 역시 시간의 역행 자체를 모르는 모양이다. 아서는 여러 고민과 노력 끝에 해결방안이 없다는 사실만을 깨닫고는 별로 꺼내지도 않은 짐들을 정리해 일단 길을 나섰다.

더 곤란한 점은, 누군가의 기억이나 의식 속에 들어온 것처럼 밀레시안으로써 누렸던 많은 것들을 빼앗긴 점이었다. 펫을 소환해도 응답하지 않고, 어디서나 원하는 마나 터널로 이동할 수 있는 기이한 힘을 쓸 수도 없다. 잠시 자신의 집을 들르는 것도 할 수 없고. 대륙을 건너는 때에도 그저 맨다리로 걸어 배를 타는 수밖에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무한하게 늘어나는 가방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가이레흐 언덕의 잔디 사이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걷는다. 그 길 위의 밀레시안은 오래전 과거를 떠올린다. 까마득히 옛날. 동료들과 세 용사의 길을 따라 걸었던 길을 떠올렸다. 티르코네일에서 던바튼으로, 던바튼에서 반호르로. 그리고 허상의 낙원으로 떠나던 길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사이에 있으면 지칠 줄을 몰랐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으며, 매일 밤에 피우던 캠프파이어가 그토록 따듯할 수 없었다. 나른한 음악 소리. 앞을 비추는 희망이란 이름의 빛. 모든 것이 잘 짜인 각본처럼 순조로웠다.

그 여행은 꼭 세 용사의 여정을 닮아있었다. 그들이 걸었던 땅을 밟아 나아가는 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는 파멸의 결과가 두 번 이상 일어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막힌 우연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우연이 비껴갈 수 있을까. 그걸 위해 돌려보내지 않는 걸까. 혹은, 이것도 허상의 낙원을 좇는 길인가. 아서가 가이레흐 언덕을 지나 반호르로 향하는 동안, 상념은 발목을 붙잡고 광산 아래까지 질질 끌려 따라 들어갔다.






* * *



고요한 광산마을에서도 그 이름이 들리긴 마찬가지였다. 밀레시안이 탈틴과 타라에서 그림자 영웅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무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수리하는데 애먹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뭐 그런 시시콜콜한 잡담에서 루에리는 또다시 그의 소식을 듣고 만다. 언제, 어디를 가도 듣는 이야기다. 결국, 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금세 잊을만한 사소한 말소리들이 모여 그의 여정을 낱낱이 알게 된다. 언젠가는 화가 나는 것 같았지만, 어느 샌가부터 그것은 곧 익숙해져서 삶의 이벤트도 되지 못했었다. 바로 얼마 전.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떠올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제 곁을 채우고 들어앉았던 얼굴은 그야말로 영웅의 모습이었다. 영웅을 묘사하는 에린의 모든 말이 그를 위해 있는 말이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 신이 내려다보는 것 같은 담은 것 없는 시선, 전혀 영웅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인데도 무기를 쥐면 빛이 드는 눈동자, 위험 상황이 종료되면 시답잖게 웃어넘기는 모습까지. 루에리는 다시 생각한다. 제 앞에서 쓰러진 트리아나와 리안, 그 앞에서 보이던 그의 당황스러운 낯빛을. 눈을 감는다. 맞춰지지 않는 퍼즐이 흐트러졌다. 그 흩어진 틈 사이로 가벼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고,

"뭐야, 왜 이런 데서 혼자 궁상떨고 있어?"
"...?"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허무는 손이 루에리의 팔을 붙들었다. 그 단단한 팔은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는 몸부림에도 쉽게 뿌리쳐지지 않았다. 허탈할 만큼 가볍게 들어 올려져 손 주인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밀레시안은 뻔뻔한 낯짝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민다.

"밥 먹으러 가자, 나 열아홉 살 몸이라서 혼자 주점 못 들어가."
"뭐?"
"그리고 여기 이비 자리니까 무서운 얼굴로 그렇게 있으면 안 돼. 네 인상 좀 봐라, 나도 무서워 죽겠는데 애는 어떻겠어?"

그 말과 행동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랍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분명 어제도 이런 모습을 보았던 것 같은데,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세상에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 그런 이름이 무색하게도 아무것도 아닌 주민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섞이는 사람. 원래 알던 사람처럼, 늘 보았던 사람처럼……. 마을 주민들이 서술하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 듯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대가 다름이 아닌 루에리, 자신인데도. 그를 보는 시선이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있는데도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 이것은 기만인가, 그저 성격일 뿐인가. 상념 새로 불편한 말이 새어나갔다. 상대는 그렇게 받지 않았지만.

"…네놈과 마주 보고 밥을 먹으라고."
"어제도 먹었는데 뭘."
"어제는…."

루에리의 로브 자락에 들러붙은 붉은 흙들을 아서가 습관처럼 손끝으로 톡톡, 쳐 내자 루에리가 그 손을 날카롭게 쳐냈다. 잠시 말이 끊긴다.

"아, 미안."
"미안해할 줄은 아나 보군."
"여기서 더는 못하지. 가자."

그는 가볍게 눈짓한 후 주점으로 향하고, 루에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지금 시간에 마을 밖으로 나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어차피 배가 떠나기 전까지는 여기 머물러야 하니 선택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 *




루에리는 조금 체념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진작 뿌리쳤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도 못 한 채 거의 휘말리다시피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때는 이미 한참은 늦은 후였다. 둘은 결국, 주점에 들어와 마주 앉는다. 루에리는 그를 바라봤다.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고, 짧게 후회하고 만다.

그를 앞에 두면 감정이 늘 통제를 벗어나 넘실거렸다. 조금만 기울여도 완전히 쏟아져나올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 쏟아진다면 그것은 잉크처럼 여기저기 스며들어 영영 지워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때문에, 루에리는 생각을 접고 식기를 집었다. 그 면상을 보고 영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던 식사는 의외로 편안하게 넘어가며 술안주에 가까운 요리들의 맛을 느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케 여기까지 왔네."
“못 올 이유가 있나?"
"아니, 그냥 안부차 하는 말이지."
"안부를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그건 그렇구나." 납득하는 말 끝에 미묘한 침묵이 흐른다.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서는 잠시 턱을 괸 채 루에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의 얼굴을 보며 늘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저런 얼굴을 했다. 비록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진중한, 무겁지만 무섭지는 않은. 어떤 따듯함을 숨길 수 없는 얼굴 말이다. 딱 그가 걸어온 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르게 걸어왔다면, 조금만 더 밝았다면. 그는 자신보다 더 영웅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터다.

순간 그에게 손을 뻗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들어서, 아서는 근처의 병을 집어 들었다.

"안부 나누기 어색하면, 맥주라도 한잔하든가."

그 말에 시선이 밀레시안에게 와닿는 것도 잠시, 루에리가 그 맥주병을 낚아챘다. 너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대처하지도 못한 아서가 자신의 빈손과, 루에리의 손을 본다. "미성년이 내 앞에서 술 마시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서."라는 말까지, 이렇게 자연스러울 일인가…….

"허…. 내가 미성년이겠냐?"
"19살 몸이라 주점에 혼자 못 들어온다고 한 건 누구고."
"아아아, 말이라도 못 하면."
"불만 있나?"

됐다, 됐어. 아서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식기를 들었을 때 루에리가 맥주를 따고 잔을 채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밀레시안에게 이 모든 것은 너무도 낯선 일이었다. 그의 모든 생이 끝나기까지 그저 대적자로서 칼을 맞대기만 했던 자였기에 그랬다. 살아가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평범한 사람처럼 맥주 한 잔을 따르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 때문에 아서는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잔을 채 채우지 못하고 병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루에리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

그 의아한 눈빛에서 질문이 떨어지기 전에, 아서가 손을 뻗어 그 잔을 빼앗아왔다. 마찰음을 내며 잔이 테이블을 미끄러져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꾸깃하게 접히는 미간, 불만스러운 시선.

"너도 먹지 마."
"왜지?"
"안 그래도 고민 많은 성인 남성이 혼자 술 마시면 처량하게 보이니까."
"허."

맥주라도 한잔 기울이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 이 농담과 어색한 식사 자리를 최대한으로 늘리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그 긴 시간 중 어떤 시간이 소강상태인 둘 사이에 다시 불을 붙일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지 않은가. 변명 같은 말을 머리에 새긴다. 그것이 관계를 비트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공포인지를 무시하고서.

"먼저 일어난다."

아서가 빈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을 했지만, 이내 말하지 않을 것이라 결정했는지 이내 자리를 떴다. 시선을 그렇게 못 떼고 있던 것과 다르게,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이번에는 루에리가 응시했다.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식사시간이 지났다. 절대 아무렇지도 않지 않았던 식사시간이 지났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식사를 하는 것도, 캠프파이어에서 몸을 녹이고, 잠을 자고, 손이 닿으면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루에리가 알고 있는 밀레시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무언가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전에는 몰랐던 것, 아서가 더이상 소문과 추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 * *




반호르에 포워르가 침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호르는 광산의 광부들이나 유명한 대장장이, 마을에서 자라며 전투에 익숙해진 주민들이 있었다. 바리던전을 통해 포워르가 주기적으로 올라온다고 해도 그것을 대처할만한 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한곳으로 쏠렸다. 루에리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으니,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어린 시선.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남이 할 수 있는 일을 떠맡는 것을 필요 없는 일이라 여길 만도 했다. 그러나 그 밀레시안은 한숨조차 쉬지 않고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낸다. 그런 부담마저 마땅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인 양.

"들어가 있어, 내가 할 테니까."

그 가벼운 말을 대피명령으로 받아들였는지 이내 모든 사람이 자리를 피했다. 당연하게 무기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아서와 루에리 뿐이었다. 포워르들이 괴성을 지르고, 어떤 것은 두 사람에게, 어떤 것은 마을을 향해 흩어지거나 뭉쳐졌다. 수가 제법 많다. 하지만, 이것을 시련으로 칠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저 두 사람 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빛의, 어둠의 기사의 길을 걸어온 둘에게 바리던전쯤 되는 던전을 정복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으니, 그들 중 일부가 올라와 벌인 전투에서 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저 무기를 몇 번 휘두른 것으로 한 무리가 쓰러져 죽거나 다쳤다. 누군가의 피가 뿌려지자, 힘의 차이를 실감한 포워르들 중 몇몇은 자기들끼리 무언가 소리치며 이야기한 후 광산으로 다시 뛰어간다. 그러자 루에리가 그들을 잡기 위해 도약했다. 다만 그 공격을 받아낸 것은 등을 보인 포워르가 아니라 밀레시안이었다. 강한 충돌음이 들리고, 그 어마어마한 충격에 두 사람이 조금 밀려났다.

"무슨 짓이냐."
"다 죽일 필요는 없잖아. 살고 싶어서 도망가는데."
"죽이지 않으면 그들은 복수를 위해 다시 오게 될 거다."

기묘한 시선이 맞붙는다. 죽고 죽이는 문제, 선과 악을 가르는 문제, 혹은 약간의 미래를 가늠하는 문제들. 어떤 것이 옳다 할 수 없는 문제들이 도마 위에 올려졌다. 적극적으로 서로를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할 문제였지만, 아서는 그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나는 못 하겠는데." 하는 짧은 말만을 뱉는다.

논리라고는 없는 말. 하지만 그것은 명확한 신념을 담았다. 약자임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자의 뒤에 칼을 꽂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포워르라도. 심지어 소통이 불가능한 자라도.

그런 그가 트리아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떠올린 루에리는 인상을 구겼다. 이만한 위선이, 이만한 기만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이 위선이 아니게 되려면 트리아나에게도 그렇게 해야 했다. 포워르였어도 그 아이는 나약했으니까, 그 아이야말로 살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어떻지. 루에리가 검 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그건 너의 위선일 뿐이다, 밀레시안. 네 행보가 늘 그랬던 것처럼, 네 이면에서 또 누군가는 피해를 볼 테지. 돌아선 포워르의 복수심은 결국 네가 아니라 이 주민들을 향하게 될 거다, 비켜."

그 말을 끝으로 루에리가 검을 휘둘렀고, 밀레시안은 명확한 의사를 표현하듯 그 공격을 다시 막아냈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의 무기가 맞부딪히며 주변에 파문이 일었다. 틀린 말 하나 없는 것이었다. 아서는 언제까지나 반호르에 머무를 수 없고,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는 없다. 잘못된 선택이 사람을 죽이고, 이기적으로 베푼 위선이 피해로 돌아오는 일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모든 시련을 자신이 막아낸 위선으로 에린의 주민들이 나약해진 것만 봐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가. 아서가 손에 힘을 줘 루에리의 검을 쳐 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그럴 수 없는 이유라는 것이 아서, 혹은 둘에게 있었으니까.

"나, 포워르인 친구가 있어."

아서가 먼저 입을 열었고, 말을 잇는다. 그 순간 관계가 다시 비틀릴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네게도 그 아이가 있었잖아."

쨍강,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루에리의 표정이 사납게 굳어지고, 이내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었다.

"닥쳐, 아서."

루에리가 아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증오와 복수심이 어린 익숙한 눈빛과, 속을 알 수 없는 색의 흐릿한 눈동자가 마주했다. 언젠가는 거기에 죄책감이라도 느꼈던 것 같다. 그 죄책감에 갉아 먹히고, 가라앉고, 또 잠식되어서 아무 말도 못 했을 때가 있었다.

"네가 트리아나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런 때도 있었다. 그랬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을 느끼기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그런가. 나는 모르겠는데."
"뭐…?"

너무도 많이 꼬였다. 아득히 먼 거리를 돌아왔다. 오랜 시간 전부터 시작된 오해는 두 사람의 머리, 상상에서, 왜곡된 기억 속에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변해왔을 것이다.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런 것을 풀어낼 수 있을까. 정말로 잘못이 아니라 오해라고 한들, 그것을 인제 와서 증명하거나 되돌릴 수 있을까. 밀레시안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다. 그를 만나고, 그를 잃고, 다시 그를 찾아오는 시간 동안.

"방금 네 말들을 생각해 봐.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 애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닥쳐!"

그렇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루에리는 결국 손을 뿌리친다. 아서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노나 증오보다는 상처받은 얼굴에 가까웠다. 절망에 가까웠다. 애당초, 네가 사람을 그렇게나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한가. 결국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게 아닌가. 아서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어."
"너는 그렇게 했다. 죄를 회피하려고 하지 마!"

목소리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같은 수많은 후회. 다른 것을 내팽개치고 너를 쫓을 수는 없었나, 그 자리에서 자신이 아니라는 말 대신 잘못을 빌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맞아, 나는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 모든 후회가 더는 의미가 없음을 안다. 모든 일은 이미 벌어졌으며, 후회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아갈 길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는 것임을. 뒤에 있는 것은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 잘못이 있었으니까, 그런 희생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이렇게 변했어."

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을 거고, 그렇게 하게 두지 않을 거야. 루에리. 그 밀레시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
"더는, 그때와 같은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아."

아서는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턱 끝에 걸려있음을 깨닫는다. 그 얼굴을 보면 누구나 사과하고 싶어질 것이다. 루에리, 에린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 그를 벼랑 끝으로 몬 것도, 그를 구해내지 못한 것도 아서였지만, 그 어떤 것도 아서가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 한마디만큼은 뱉을 수가 없다. 그걸 뱉는 순간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 밀레시안의 사죄가 되어 갈 곳 없는 분노만 루에리 혼자 떠안게 될 것을 아서는 알았다.

너에게 증오를 받아도 좋다. 그 복수심이 끝내 자신을 죽이게 되더라도, 그것을 놓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그 마음과 동시에 모순되는 감정이 든다. 너를 갉아먹는 감정에서 해방되면 좋겠다는.

루에리의 시선이 떨어진 것을 깨닫는다. 그 붉은 머리 아래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것으로 네 잘못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아서."

모순 중 한 방향이 깨어져 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다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트리아나를 잃었던, 리안을 잃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아서의 칼에 두 사람이 쓰러진다. 그것이 루에리가 아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그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고, 자신이 그를 저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흔들리는 일이 일어났다.

눈을 깜빡이면 모습이 변했다.  아서가 아닌 다른 이의 칼에 맞고 쓰러지는 트리아나. 이미 살 수 없었던 상태의 리안. 모든 것이 오해라는 가정. 다시 한번 깜빡이면, 다시 모든 일이 있었던 일이 된다. 그 어떤 일도 그 밀레시안의 의지는 아닌 채로.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혼돈이었다. 한 번도 생각하거나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 사실인 양 머릿속에서 그려졌다가, 흩어지고, 잘리고, 다시 붙여지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사실이 생겼다 사라진다. 되려 모든 것이 거짓만 같았다. 이 과정에서 확신할 수 있는 점은 단 하나, 더는 그 무엇도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설사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맞아, 나는 그렇게 했지.' 아서는은 루에리가 아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변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괴물의 모습을 한 포워르여도 이유가 없으면 사살하지 않는다고. 그 말은 일어난 일을 바꾸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 말로써 일어난 일을 보는 관점이 뒤흔들렸다. 오래전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이상 생각하고, 고민하고, 되씹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루에리는 혼돈에 잠겨 있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모든 시간이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흔들렸고, 넘실거리던 감정이 쏟아져 사방에 흘러넘쳤다. 이미 모든 것이 검은 잉크처럼 스며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포워르는 복수를 명분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말이다.



"나, 먼저 갈게."

그 후, 아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떠날 채비를 다 하고 대뜸. 그냥 떠났으면 될 것을 굳이 루에리의 앞까지 걸어와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리고 루에리가 답을 하기 전에 돌아섰다. 해변 방향으로 몇 걸음. 이내 다시 돌아서서 몇 걸음 돌아온다. 전투 이후 대화를 나누던 때처럼, 진지한 투로 입을 연다. 이전처럼 가벼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나, 미안하다는 말 정말 하기 싫은데." 그 역시 혼돈 속에서 지내기라도 한 것처럼.

"한가지는 미안해."

그리고 흩어지는 시선. 망설이는 숨, 떨리는 입술. 중대한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목소리가.

"좀, 잘 지내보고 싶었어.“

감정에 실려 떠내려온다.

”……내가, 변하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미안해. 말을 맺는다. 잘 살라던가, 밥은 먹고 다니라든가, 덧붙일 인사말을 생각해 놓았던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뱉을 수 없었고, 그렇게 밀레시안은 돌아섰다. 루에리의 마지막 표정도 보지 못한 채로. 이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망가뜨렸는지, 조금 괜찮은 방향으로 틀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이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면 또 잊을 것이다. 어차피 이번의 시간여행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광산마을에서 해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간은 그랬다.



얼마 가지 않아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얗고 노랗게 변했던 발아래의 흙이 다시 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한걸음 뗄 때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굵어지고, 비처럼 상념이 쏟아졌다. 홍수에 잠겨버릴 것 같았다. 어딘가로 끝없이 추락해버릴 것만 같다. 비참함이 발목을 끌어당겼다. 저 심연 아래까지, 나락 끝까지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 두려움 속에서, 빠르게 걷던 아서의 걸음이 멈췄다. 발아래의 심연보다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시간은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었다. 동시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선택지가 주어지더라도, 영원히.

발을 돌렸다. 목적지가 확실하니 걸음이 빨라졌다. 풀이 자란 땅을 박차고, 붉은 흙이 깔린 마을로 돌아간다. 누군가가 돌아온 자신에게 무어라 묻는 말을 던졌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빠르게 계단을 오른다. 차게 식은 다급한 숨, 목적지를 훑는 시선과 가쁜 발걸음. 똑똑 노크 소리, 다음의 침묵. 이내 문이 열렸다.

"밀레시……"
"나, 하룻밤만 재워주라."
"뭐?“

당황한 눈빛이 시야에 담긴다. 고개를 숙였던 그때의 모습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주점에서 보았던 얼굴만이 시야에 담겼다.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진중한, 무겁지만 무섭지는 않은. 어떤 따듯함을 숨길 수 없는 얼굴. 말이 이어졌다.

"비가 오는데 방이 없네. 사실 그렇다고 거짓말하는 중이야. 그냥, 그냥."
"……."
"이러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하룻밤만 줘."

아서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내려다본 시야에는 루에리가 들어왔으므로, 그 머리카락에, 로브 자락에 맺힌 물이 루에리의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루에리는 붉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걸로 뭔가 변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서."
"그거야 모르는 거잖아.“

그 목소리는 간절하기 짝이 없다.

"너도 궁금하잖아. 속에 들어와 있는 이게 다 뭔지, 어떤 형태인지."

하지만 루에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속에 들어앉아 감정을 엉망으로 어지르는 것. 기억과 생각을 뒤엎는 것, 쓸데없는 욕심과 죄책감을 끌고 오는 것. 벽 하나를 허물고 나니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 해묵고, 때 묻은 감정.

"알게 되면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너도, 나도."

그것이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루에리가 한 걸음 멀어졌고.

"빌어먹을 후회.“

아서는 한 걸음 다가섰다.

"하라고 해, 어차피 너랑 엮인 모든 건 후회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 *



그 옷자락을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루에리는 또다시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낯선 감촉에 입술이 어쩔 줄 모르고 헤맸고, 아서는 손으로 턱을 벌려 입술을 겹쳤다. 비에 젖은 차가운 체온이 방 안의 따스한 체온과 기분 좋게 섞여들었다. 그 입맞춤처럼 뒤엉킨 발걸음 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야말로 애정이라고밖에 표현될 수 없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루에리는 문득, 그 입맞춤이 며칠 전, 처음으로 입술을 맞대었던 때 느껴지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그래, 오래도록 그는 이런 태도였다.






* * *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음성이 새어 나온다. 약간의 흥분이 섞인 음성에 미미한 짜증이 깃들어 있는 것마저 아서는 꽤 마음에 들었다. 루에리의 손이 아서의 팔 위로 올라왔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섞인 손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제라도 하지 말까? 묻고 싶은 말을 삼킨다. 아서의 두려움은 반대쪽이었으니까. 싫다고, 없는 것으로 하자 할까 두려웠다. 모든 것이 없는 일로 돌아가 버릴까 두려웠다. 그런 불안함을 증명하듯이, 두려움에 저항하듯이, 아서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이내 저항감이 있는 몸을 당겨 제 것을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단단하게 선 기둥이 안쪽 깊숙이 예민한 곳을 찌르자 목을 긁는 신음 소리가 난다. 앓는듯한 신음성. 저러면 목 다 잠길 텐데. 아서는 목을 울려 웃고, 달래듯 그 입가에 입 맞췄다.

"미안, 아팠어?"
"이 뻔뻔한 자식이…."

처음이라니까, 천천히 해야지. 그래서 조금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바르작대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를 품에 안은 자에게는 과한 자극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어쩔 줄을 모르는 허리가 들썩일 때마다 자신의 것을 꾹 쥐는듯한 감각이 저릿하게 느껴진다. 아래에 피가 쏠리는 것 같은 흥분감은 더 차오르기만 했다. 그저 기다릴 뿐인데도 흐트러진 숨소리를, 억눌린 신음을 흘린다. 루에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밀레시안의 팔을 밀었다. 하지만 어쩐지, 어느 시점부터는 계속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떤 망설임이 남은 것인지, 혹은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온 이가 밀리지 않으려 더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는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 없다. 둘의 변덕으로 시작된 밤일 뿐이었으니 원한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자기 자신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루에리는 묘한 패배감을 느낀다. 비단 상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서의 넓은 손이 루에리의 붉은 머리 아래 드러난 목을 감싼다. 고개를 숙여 섞이는 뜨거운 숨 속에서 속삭였다. "입 좀 벌려주라."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진실된 감정이 담길 때만 그렇게 변하곤 했던 웃음기 없는 목소리가. 루에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입맞춤을 받았다.

"흡…!"

그 입맞춤이 눈속임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안에 들어찬 것이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제자리를 찾듯 밀고 들어온다. 내벽이 함께 쓸려나가는 것 같은 불편감이, 안을 채우고 누르는 압박감이 곧이곧대로 느껴져 입술 새로 숨이 새어나갔다. 하지만 그 집요한 움직임은 양보할 줄을 몰랐고, 달래는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얼굴을 맞대고 있음에도 높아지는 숨을 참을 수가 없어서 루에리는 결국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좀 떨어져…숨 막혀." 그러자 아서의 손길이 붙잡고 있던 목덜미에서 떠나 허리를 쥔다. 이어지는 허리짓에 그가 쉬이 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좀 괜찮아?“
”……이상해.“
"어쩌지… 난 너무 좋은데.“

붉은 눈빛이 날카롭게 물든다. 한결같이 날이 선, 낯익은 얼굴이 된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사람을 밀어낼 수도 없는, 태생이 무른 사람. 그를 바라보는 흐릿한 빛의 시선이 애정을 담아 선명하게 흔들리는 붉은 눈과 마주했다.

더는 못 참겠다고. 아서가 속삭였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처럼 맞닿은 몸이 긴장한다. 단단한 근육이 딱딱하게 굳고,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미적지근하던 체온이 어느새 흥분감으로 달아올라 있는 것이 느껴졌다. 꼭 기대감에 가득 찬 모습이네. 즐거운 숨에 웃음기가 걸린다. 그런 그를 달래듯 페니스를 쥐고 쓸어주며 귓가에,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애무했다. 그리고 이내 경험이 없는 자를 배려해 굳이 참아왔던 인내심을 풀었다. 단단하게 선 성기를 빠지지 않을 정도로 뺐다가 깊은 곳까지 쳐올리자,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흥분된 신음성이 섞여들었다. 어떤 때는 느리게, 어떤 때는 다급하게.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불규칙적인 움직임에 루에리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 어깨에 매달렸다.

아서는 품에 안긴 이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허리를 꽉 끌어안고 안쪽을 파고들었다. 팔을 끌어 잡고 자세를 바꾸고 싶은 충동이 든다. 손자국이 남도록 붙잡고 몇 번이고 거칠게 밀어 넣어 울려버리고, 또 달래고 싶은 마음을 조금 참아냈다. 붉은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보면서, 얼굴을 마주 본 그대로 허리짓을 이어갔다.

"윽, 아…!"

조금 높은 신음이 터진다. 목에서 쏟아지는 소리가 가둬지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그 붉고 선명한 시선은 흥분에 녹듯 풀려 있었지만, 그 위로 당황스러운 빛이 어린다.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모습을, 그만하라는 듯 밀어내는 손길을 느끼면서도 아서는 멈출 줄을 몰랐다. 잠시 멈추는가 싶었을 때는 입가를 가린 그 손을 당겨 깍지꼈다. 흥분으로 전신에 달뜬 흥분감이 가득했지만, 닿은 손이 유독 델 듯 뜨겁다. 아서는 다시금 거칠게 밀어붙였다. "루에리, 나, 봐. 피하지…말고." 흥분감 어린 눈동자에 애정이 쓰여있는 것을 알면, 루에리는 꼭 그 품안에 갇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뜻대로 빠져나갈 수도,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것을 뜻대로 멈출 수도 없는. 동시에 그 행위들에서 색정을 느끼는 자신을 깨닫는다. "하윽, 싫, 싫어…아, 흣…!" 애원하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흥분에 절여진 것 같은 소리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흘러나왔다. 몸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치욕스럽게 느껴지고, 그것이 흥분으로 전이되는 것에 수치를 느꼈다.

"루에리."

귓가에 낮게 울리는 소리에도 등줄기를 타고 저릿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상대가 그인 걸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라서 그랬을 것이다. 늘 제가 원하는 만큼 거리를 유지해주던 상대가, 고삐 풀린 짐승처럼 신음을 흘리며 저를 붙잡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도, 언제나 제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던 입술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것처럼 몇 번을 입 맞춰오는 것도, 이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가 하반신을 쳐올릴 때마다 갈증이 났다. 속삭일 때마다 애가 타고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수치스러움이, 속에서 일렁이는 여러 감정이, 온갖 불안정한 마음들이 모두 욕정으로 흐르고, 급기야는 그를 원하는 것 같은 감정이 일었다. "아서…제발, 좀." 애원이라도 하는 소리에 그 이름이 섞이면, 아서는 이제 못 참겠다는 듯 루에리의 목덜미를 깨물며 안쪽에 파정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느라 입이 메말랐다. 그 입술에 아서는 익숙한 것처럼 입을 맞춰온다. 고작 하룻밤 몸을 섞었다고 그것이 익숙해질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아서가 여전히 그에게 조심스럽게 굴었기 때문에 루에리는 가만 제 입술을 벌려주었다. 혀가 섞이고, 체액이 섞였다. 서로의 숨을 삼키면서,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존재를 체감했다. 추상적인 복수의 대상,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람. 다시는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상대. 입술이 떨어져도 다시 당기고, 다시 눌러 집요하게 따라붙어 입안을 침범하고, 낯선 혀를 섞었다. 아쉬워 죽겠다는 듯이.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좀, 놔."

그런 그를 다시 밀어낸 것은 루에리였다. 더하면 물어버리겠다고 위협의 말도 따라붙는다. "그거 너무 야한 거 아냐?" 어느 정도 이전처럼 돌아온 가벼운 목소리로 답하는 아서는 그의 입가에, 턱에. 잠긴 소리를 내는 목젖에 차례로 입 맞추며 자연스레 후희를 이어갔다. 낯선 흥분이 그렇게 가득히 들어차 있었으니 아직 여운이 남아 다 떨쳐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길고 굵은 손가락이 몸을 훑을 때마다 잘 잡힌 근육들이 잘게 떨었다. 언제 쏟아졌는지 모를 정액을 머금은 근육들 사이의 굴곡 위에 손가락이, 그 것을 따라 내려가는 이의 입술과 혀가 닿고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이내 제지하는 손이 어깨를 잡았다. 두려움과 망설임, 흥분감이 섞인 손길이었다. 동시에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간 손길이었지만, 그 불멸자는 순순히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번엔 진짜로 버티네." 루에리가 짜증스럽게 툭툭, 힘을 주어 밀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서는 떨어질 줄 몰랐다. 대신 비슷한 힘으로 버텼다. 진득하게 핥아 내리던 입술은 하체로 내려가 멈추거나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오히려 사정 후 늘어져 있는 상대의 것을 손으로 쥐고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그를 밀어내는 것에 실패하고 애무를 받던 루에리가 펄쩍 뛰기라도 할 것처럼 놀라는 것이 아서의 손과, 입에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진짜 발정이라도 난 거냐." 그 머리채를 잡아 밀어내자, 선단 끝에서 겨우 입을 떼고 음란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 마주쳐온다. "아마도?" 그의 긴 손가락이 루에리의 한쪽 다리를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한 번만 더 하자."
"미쳤어…"
"음. 아마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보통은 나를 죽일 남자랑 자진 않지. 대화라고 할 수 없는 말들이 오가는 동안에도 아서가 손을 쉬지 않아서, 루에리는 다시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이제 둔부를 단단히 받치고 어느새 다시 고개를 쳐든 중심부를 입에 머금었다. 그렇게 서슴없는 몸짓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는 생소한 느낌이 앞섰다. 따듯하게 젖어있는 말캉한 입술이, 혀가 닿고, 자신의 것이 삽입이라도 하듯 상대의 입 안쪽 깊숙이 들어간 감각이.

다시금 저릿한 것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만……. 더는 처음이 아니게 되어버리자, 자연히 이후에 일어날 일을 예상한 몸은 금방 달아오른다.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흥분에 들뜬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머리통을 밀어낼 작정으로 머리채를 잡은 거였지만, 그 손이 아무 역할을 못 하는 동안 추삽질을 하듯 그가 움직임을 이어갔다. 빨아내듯이 당겼다가 다시 끝까지 삼키고, 다시 빠져나온다. 문득 시선이 들렸다. 진짜 그만하고 싶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 루에리는 어떤 충동에 이기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응답하듯 성기가 목구멍에 닿을 듯이 밀려들어갔고,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의 사정감이 느껴졌다.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성욕이 들끓어 사고가 마비된다. 그의 심성대로라면 충동에 못 이겨 머리를 잡고 추삽질을 이어가도 그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루에리가 다 밀어내지 못한 고민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아서가 제 머리칼을 잡은 손을 잡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잘 참네. 입에다 하기 미안했어?“
"…어떻게 하겠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데. 지금은 좀 늦었지만."

방금까지 물고 있었던 것 때문인지, 그 역시 비슷한 흥분을 느끼는지. 애타는 목소리가 어쩐지 더 질척하게 들려온다. 그는 루에리의 허리를 끌어당겨 상체를 다시 눕게 했다. 여전히 다리가 올라가 있어서 조금 비틀어진 자세가 되었지만, 그런 것에 치욕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미쳤냐고 매도하는 대신 뭐든 빨리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리가 들어 올려지니 기묘한 안도의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상대가 충분히 일어선 자신의 것을 뒤로 밀고 들어왔다. 시야가 아찔해지며 상념이 흐트러졌다. 속에서 무언가 녹아내린 것 같았다.

"아, 윽…."
"하, 좋다… 아까보단 훨씬 낫네."

그렇지? 아서는 저항감이 훨씬 줄어든 루에리의 안쪽에 들어서며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말했다. 몸과 함께 딸려 올라온 그의 다리에 입 맞추고. 발목을 깨물어 자국을 남겼다. 순간 그것이 오래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을 깨닫는다.

아서는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상념을 밀어내려 깊게 파고들고, 긴장한 그의 몸이 자신을 죄어오는 걸 잠시 느끼고 다시 쳐올리기를 반복했다. 아서 역시 턱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놓을 수가 없고, 멈출 수가 없다. 언젠가의 입맞춤처럼, 그 형태를 알 수 없는 질긴 인연처럼.

"윽, 아…! 천천히, 좀,"
"하… 루에리, 너무 좋아."
"이 망할, 자식이……."

루에리의 신음소리가 어느 샌가부터 가로막히지 못하고 쏟아지는 것을 아서는 깨닫는다.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에게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때문인지, 그의 안에 자리 잡았다는 만족감 때문인지, 혹은 그저 달뜬 열기들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그 천천히 허리짓을 멈추고는, 루에리의 팔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제 위에 올라오는 무게감도, 더 가까이 닿는 체온도. 이렇게 기꺼울 수가 없다. 흥분감에 풀어진 건지, 이 상황들에서 몇 가지를 포기해 버렸는지. 루에리는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바라보면서도 순순히 끌려왔다. 품에 안은 모양새가 되자 아서가 그 허리를 받치고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 맞췄다.

"아팠어?"
"……그게 멎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하하… 미안. 달래면서 하는 건 잘 못해서."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였지만. 아서는 쓸데없는 말을 뱉지는 않았다.

"다리에 힘을 좀 풀어봐. 내가 해 줄 테니까."

아서가 루에리의 둔부를 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스스로 움직여보라느니, 같이 움직여 달라느니. 상대가 다른 이라면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체위였지만  아서는 다시 참아낸다. 그런 요구를 들어줄 리도 없었고, 그가 이미 한 발……아니, 몇 발 양보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여정에 발걸음을 붙일 때도, 몇 마디 말을 건네고 답을 받을 때도, 함께 식사를 할 때도, 기어이 이 침대로 끌어당겼을 때도 그는 아서의의 뻔뻔스러운 요구에 어쩌다가 말려들어 뜻하지 않게 몇 발씩 양보한 것이 아니었는가. 최소한 아서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윽…."

비교적 가벼운 요구에 따라 그가 다리에 힘을 풀어 아서의 손에는 무게가 실렸다. 아서는 붙잡은 팔에서 천천히 힘을 풀어 그의 체중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끝까지 삼키게 했다. 겨우 힘을 푼 다리가 떨리는 것을,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 손톱에 패인 자국이 생기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의 몸을 들었다가 내리며 허리에 힘을 줘 쳐올렸다. 누워있을 때보다 깊게 들어오는 감각에 루에리는 어느샌가 통증보다 더 큰 흥분이 차오르는 것을 깨닫는다. 목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들에 상대를 원하는 듯한, 애타는 감정들이 깃들어 아무렇게나 뭉개진다. 결코 얇지 않은 몸이 자극적인 감각들에 녹아내리듯 중심을 잃어 상대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곤 그저 제 몸을 붙잡고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서 위아래로 흔들렸다. 질척이는 소리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아픈 신음과 섞인 흥분된 음성이, 달아오른 뜨거운 숨소리가 섞이며 다른 것들을 잊은 두 사람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픈 적 없던 부위들이 통증을 호소했다. 격렬한 전투 후보다 지친 몸이 엉망이 된 침대 위로 늘어졌다. 몸을 섞은 지 시간이 조금 지나 이제는 숨이 다 가라앉은 루에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서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러면 아서는 선명한 빛을 찾은 붉은 눈빛을 본다. 깊은 곳을 칼에 베인 듯 새겨진 감정은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오래전에 떠올렸던 생각이 머리를 떠다닌다.

"키스해도 돼?"

뻔뻔스러운 낯이 물었다. 여전한 목소리였다. 미쳤냐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싫다고 말하고만 싶었다. 후회할 거라고, 너와 내가 느낀 것은 전부 착각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서가 이내 입을 맞춰왔고, 루에리는 턱을 들어 입맞춤을 받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모르겠다, 아서.”

그 별거 아닌 울렁거림이, 쏟아진 감정들이 이런 식으로 정리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루에리가 덧붙였다. 아마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너를 용인하면서도, 동시에 증오하는 걸 멈추지 못할 거라고. 그 이야기들을 아서는 담담하게 듣는다. 그 끝에 답을 했다. “근데, 나도 그래.” 제 표정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가 없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러니까 싫으면 전처럼 때려도 돼. 욕하고, 증오하고, 깨물고, 심지어는, 아직 죽이고 싶다 해도 상관없어.”

아서는 잠시 루에리의 손을 내려다봤다. 거칠고 상처 많은 손이었다. 몸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몸에서는 세월감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꾸준히 자랐겠지. 그동안 검을 쥐고 놓을 줄 몰라 이렇게 거칠고 단단해졌겠지. 처음엔 꿈으로, 다음엔 희망으로, 어느 순간 절망과 증오로. 그 모든 것이 쌓여 이리 상처 많고 거친 몸이 되었겠지. 감상에 젖은 불멸자는 그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춘다.

“그 감정이, 그 시간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없다는걸 알아. 그래도 괜찮아.”
“그 말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지."

그러면 아서는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지는 말에는 루에리도 함께 웃은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