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에레] 그의 부재

마비노기 2차2022. 12. 23. 20:47

* G25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메인스트림을 플레이하지 않으신 분의 열람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1.

 

 

이렇게 일찍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직 한참이나 작은 소녀였다. 왕실의 예법을 익히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자신의 마음과 욕심이 책임보다 앞에 있어도 괜찮을 나이였다.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이었다. 조금 더 놀고, 조금 더 떠들고, 모든 일은 하루의 숙제가 나이를 먹으며 늘어나듯이 천천히 늘어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다. 차근차근 넘어왔어야 할 것이 산사태가 일어나듯 쏟아져 머리 위를 덮쳤다. 가족을 잃은 것에 슬퍼할 여유도 없이 책임을 손에 쥐어야 했으며,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곁을 지키던 이들이 과정에서 떠나고 사라졌지만 걸어가야 했다.. 누구의 도움이 없더라도,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자신의 의지로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가 단 하나의 후계자, 에레원이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울음을 쏟았다. 

 

..그 눈물에 흐려진 시야 속에 그가 있었다.

 

유일하게 제 옆을 지켜주던 자였다.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이였지만,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자신의 도움 요청에 응하는 이였다. 쏟아지는 울음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품 안에 받아주던 이였다. 그 날, 그 품속에서 에레원은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차마, 전달하지 못했지만.

 

"…왜 지금 그때의 일이 기억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그런 너를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모든 부탁을 명령의 형태로 말할 수 있던 걸까. 사실, 사실 너 역시도 내가 느꼈던 책임을 세계를 대상으로 느끼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너한테 내가 그 정도의 사람이고 싶은 걸까. 혼잣말처럼 내뱉는 모든 말이 닿지 않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닿기를 바랐다. 눈을 떠서, 뭐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잔소리하듯 타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에레원은 이후로도 계속 그 앞을 드나들었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그 곳에 가 있곤 했지만, 그런 왕에게 무어라 말을 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부재는 에레원의 일이기도 했지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일이었기에. …그 병실 앞은 오래도록 상념이 쌓여갔다. 어쩌면 눈물이 쌓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왕의 그 시간을 방해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모르는 일이었다. 

 

 

 

2.

 

그 밀레시안은 원래도 많이 자는 자라고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사실상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이 당연한데도, 밤을 이겨낸 그 밀레시안은 원래도 삶의 가장 긴 시간을 잠으로 보내는 자라고 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있었으니 그 누구도 그가 그저 '취침'상태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쌓여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적이라고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래 잠들어 있었으니. 

 

 

 

 

3. 

 

그러던 어느 날, 밀레시안이 눈을 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두어번 깜빡였고, 입술 사이로 한숨을 뱉었고, 제 귓가에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다시 눈을 감고, 숨을 뱉고. 다시 눈을 떠올리면, 많은 순간에 얼굴이 떠오르곤 하던, 어린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았다. 하지만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돌아선 이는 홀로 울음을 삼켜내는 것처럼 보였다. 느릿하게 잠에서 깨는 밀레시안은 작은 왕의 시간을 방해하는 대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잤더라. 하지만 잠든 이는 그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상대의 반응으로 그를 꽤 오래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을 짐작할 뿐. 눈가를 문지르는 에레원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밀레시안은 습관적으로 제 머리를, 얼굴을 단장하듯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매만졌고, 다시 고개를 들 때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잠에서 다 깨지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에레원, 나를 봐요."

 

나른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네? 조르는듯한 투의 목소리가 공기를 간질이듯 나직이 흘러갔고, 길고 흰 손가락이 소녀의 팔을 감쌌다. 늘 내리면 피해지던 시선이 아래에 있으니, 에레원은 그 시선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매던 끝에야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불렀으면 말을 해!"

 

어쩔 줄 모르고 붉어진 뺨의 홍조가 선명했고, 모든 걱정이 쏟아지는걸 애써 막은듯한 눈가가 붉었다. 작은 왕은 이 간질거림이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고 당황했고, 밀레시안은 그런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지만, 그 목소리가 작은 왕에게 얼마나 절대적일지는 그 밀레시안과 왕을 포함한 모두에게 자명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도 밀레시안이 입을 열었다. 아이가 어려운 어른에게 초콜릿을 조르듯이, 아주 조심스러운 투였다.

 

"나 한 번만 안아줘요."

"뭐?! 너 지금 그게…!"

"아무도 없잖아요, 얼른."

 

당황스러운 반응에도 태연했다. 그 표정 없는 밀레시안에게 늘 쩔쩔매던 왕이 태연하게 웃는 표정을 보고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밀레시안인이 손끝으로 잡은 팔을 톡톡, 건드린다. 하얗고, 얇은 손가락. 막 잠에서 깬 잠긴 눈, 지금 아니면 못하는데. 속삭이는 목소리... 모든 것이 그 밀레시안의 공기처럼 가라앉아 있었지만 에레원의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쿵, 쿵, 뛰는 심장 소리가 그를 잃을까 걱정되고 무서워할 때와는 다르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심장 소리에 말문이 막혀 잠시 적막이 공기를 누르고 지나갔다.  

 

"… 이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쩔 건데?"

 

 둘 주변의 공기를 울리는 작은 투덜거림과, 

 

"그럼, 내가 책임이라도 질까요?"

 

 장난 섞인 작은 목소리가 섞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 끝에, 얇고, 작고, 조심스러운 팔이 그 검은 머리의 밀레시안을 끌어당겼다. 그가 쓰러져 전장에서 멀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그에게선 아직도 은은한 비 냄새가 났다. 비 냄새, 풀냄새. 옅은 탄 냄새. 그의 전장에 자리하는 것들이었겠지. 일이 없을 때는 잉크나 종이책 냄새 나곤 했는데… 고개를 숙인 자의 검고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 귓가를 가만히 쓸어내리면 따끈한 체온이 만져졌다. 마주 끌어안은 품 안에서는 작은 호흡이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지만, 그런데도 상대의 모든 것이 선명했다. 걱정하던 모든 순간이, 침대에 쌓인 상념들이 조용히 녹아내렸다. 

 

"이제 좀 괜찮아요?"

"그건 내가 네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당신 덕분에."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난생 처음 보는, 편안히 웃는 얼굴이 작은 왕의 손안에 담겼고, 기어가듯 작은 답이 눈물 맺힌 채 떨어졌다. 

 

"이제 괜찮아. …네가 돌아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