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얀] 베인에게 초콜렛을 먹이고 싶어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3. 2. 13. 16:50

 

 


 

영원을 사는 이에게도 시기를 인식하게 되는 날이 일 년에 몇 번쯤은 존재했다. 계절이 바뀔 때, 연도가 바뀔 때, 특별한 날이 되었을 때 같은 날들 말이다. 요즘 같은 시기도 딱 그런 때였다. 인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던바튼 가득 단내가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렌타인. 그 문화의 기원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지만 밀레시안들 사이에는 명절 때보다도 떠들썩한 때였다. 수많은 밀레시안들이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 혹은 소중한 지갑을 위해 초콜릿을 만들었고, 형형색색으로 포장한 포장지들이 거리의 가판대에 놓였다. 그러면 밀레시안들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아마 자신도 만들었을─ 남의 초콜릿을 서슴없이 사서 가방에 밀어 넣었다. 포장지의 색이 중요하다나 뭐라나. 에린의 주민들은 이해 못 하는 얼굴이었지만, 얀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 사이에 섞여 가판대를 눈으로 훑었다. 

 

분명 구경만 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어떤 상자를 내려다보고 아르얀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서고 말았다. 푸른빛과 분홍빛 사이, 은은한 보랏빛을 한 그 익숙한 색은 다름 아닌 자신을 이루는 색과 가장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멈춰서 저도 모르게 손끝에 걸린 포장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전에 챙긴 적이 있던가.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챙기지 않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고 잊은 것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손가락에 매달려서 쥔 것을 쉬이 놓지 못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아르얀로드가 생각나게 하는 색의 포장지를 받을 베임네크도. 그것을 내려다보고 따라붙을 이해 못 하는 시선도.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나면, 얀은 기꺼이 값을 치르고 예쁘게 포장한 초콜릿을 넘겨받았다.

 

뻔히 몰라줄 것을 알면서도, 그 얼굴이 또 좋아서 사고 싶은 것은 무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리고 얀은 예상했던 표정을 마주했다. 차라리 포장지를 보았을 때는 그대가 선물로 고를 법 한 것 같다며 웃었는데. 내용물이 초콜릿인걸 알고서는 조금 의아해했다. 먹지도 않는 자들인 것은 둘째 치고, 가끔 간식을 먹어도 이렇게까지 자극적인 간식을 먹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 이니까."라고 설명을 덧붙여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뭇 인간들이 챙기는 하루하루를 신경 쓰지 않은 것은 한 두 해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나 의미를 모르겠네만."

 

그러나 썩 나쁘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얀이 주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좋아라 할 자이기에 그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의문을 표현하듯 갸우뚱하는 시선이 포장된 초콜렛에 다시 떨어졌다. 포장지 때문인지, 먹을 생각이 없어서인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은 시선이다. 

 

"그냥 주고싶었어. …이런 거, 해본 적 없으니까."

 

그러자 그제야 베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포장을 뜯기 고민하는 손을 거쳐, 얀이 포장을 직접 뜯어주었다. 리본을 풀고, 포장을

뜯고, 상자를 열자 바로 달큼한 향이 올라온다. 예쁘게 치장된 초콜릿들 중 하나를 집어 올리자 검은 초콜렛 위에 온갖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얀은 와중에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는 걸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이런 사소하기 짝이 없는 색깔 조합 따위를 좋아하는 것은 고작 밀레시안 정도니까. 그런데도 베인은 그 손에 들린 초콜릿을 보고 조금 소리 내 웃었다. "딱 그대가 고른 모양이군." 포장지 안쪽을 보지 않고 사 왔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나만."

"그대가 원한다면 깨끗이 비워줄 수도 있네만"

"그건 좀 후회할 걸."

 

얀이 웃으면서 초콜릿을 베인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아." 하고. 아이를 어르듯 말하자 소리 내 웃은 베인이 입을 벌려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입술이 손끝을 스치고 가면, 간질거림이 손끝에 남는다. 

 

딱히 베인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었는데. 우물거리는 표정이 조금 미묘해지는 것이 보였다. 평생 이런 것을 먹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일 텐데, 그 표정이 신기하고 새로워서 얀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사실 이래서 그렇게 고민 끝에 집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새로운 모습은 아직도 발견할 것이 많았고, 또 그때마다 모든게 사랑스러웠으므로. 

 

"별로야?"

"그대는 즐거워 보이는군?"

"그야, 당신 표정이…"

"우스운가?"

"그건 아니고."

"그럼?"

 

말꼬리를 붙잡는 말에 단내가 난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게, 초콜릿에 취약한 체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그건 또 그것대로 귀엽지 않은가. 얀은 생각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고작, 이렇게 달달한 초콜렛 하나로. 베인의 불만스러운 표정조차 퍽 마음에 들었다. 

 

"이건… 혼자는 한 개도 다 못 먹겠군."

"이제 됐……"

 

그러니 나눠먹으면 딱 알맞겠다고. 말을 끊고 닿은 입맞춤이 떨어진 뒤에야 베인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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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연] 영웅의 조각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4. 00:40

 * 드림주님의 요청을 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 25 2부 이전의 둘이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하고 길고 긴 시간이 지나 현대에 다시 태어났다는 

   설정으로 쓰였습니다. 베임네크는 기억을 가지고 있고, 밀레시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 드림주의 이름 및 모든 것이 언급됩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하게 굳은살이 붙은 손가락 끝에 유려한 선으로 조각된 영웅의 얼굴이 담겼다. 그 앞에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이 오롯이 담긴 듯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살아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바람이 불면 날릴 것 같은 생생함이 빛을 받아 반짝이기까지 했다. 그것은 베임네크가 손으로 빚어낸 작품들 중 손에 꼽는 수작이었지만, 그것을 사진 이외의 실물로 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베임네크, 그 혼자만 드나드는 공간에서만 영원할 것처럼 자리하는 것이었다.

 

베임네크는 그와 눈을 맞췄다. 이전의 삶에서도 이렇게 우러러보았던 것 같았다. 시선은 항상 아래에 있어도, 그는 그 어떤 자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자였다. 은은하게 먼 곳을 비춰 어둠을 거둬낸다는 그 새벽별의 명성과도 같게, 세계를 떠받들던 자였다. 불완전하게 끝난 그와 자신의 삶이 끝난 후에, 그 먼 훗날,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던 자신에게 그에 대한 기억이 깃들어버린 후에는 영원토록 그만을 그리며 살아갈 것만 같았다. 모든 기억이 선명했다. 마지막을 속삭이던 목소리도, 입 맞추고 떨어질 때 마주치던 복잡한 감정의 눈빛도. 그와 숨을 섞을 때 느껴지던 온기도. 모든 것이 손에 쥘 듯 선명했지만, 그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그를 잃어 영원토록 그리워할 자신만 있을 뿐.

 

그러니 빚어냈다. 어떻게든 그를 손에 담고 싶어서. 마지막 순간에서야 제게 어떤 감정을 비쳤던 그의 그, 짧았던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놓고 싶은 것처럼. 최대한 마모되지 않고 그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떠난 자들을 마음 안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이였다. 서늘한 빛을 하고 따듯한 성정을 가진 자였다.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무엇하나 떨쳐내지 못한 채 자신의 길을 가는 자였다. 그 자신의 마음을 함께 도려내야 하더라도, 그렇게 되었더라도 마지막까지 베임네크에게 삶을 끝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주고자 하던 자였다. 베임네크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만다. 뜨끈하게 돌아온 체온이 목을 감싸는 것도, 그의 마지막 말도. 그 말을 한 번만 더, 다시 듣고 싶었지만 그는 곁에 없었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시선이 담긴 밀레시안의 조각상과 베임네크. 그 자신이 있을 뿐.

 

 

 

 

 


 

그 오래 전, 베임네크는 손을 멈췄다. 몸의 힘이 꼬여 세계를 멸망시킬 위기에 있는 그에게는 오히려 끝이 편안한 길임을 아는데도 폭주하는 그에게 칼을 꽂아 넣지 못했다. 그의 손에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불길이 일렁이는 검은 그 아래에 세워진 채였고, 폭주하는 그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를 벨 수 없을 만큼 사랑해서일까. 그렇게라도 한순간이라도 더 그의 곁에 남아있고 싶어서였나. 

 

그를 사랑했다.

 

그로 인한 순간의 선택이 모든 변화를 가져왔다. 베임네크는 자신의 의무를 져버렸다. 비로소 자신의 순서가 왔을 때…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하는 순간에 그러지 못했다. 그러자 세계는 한번 되돌아갔다. 그 선택을 하게 만든 감정은 다른 것이 아닌, 포워르의 옛 왕, 발로르 베임네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세계의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만, 그가 품은 마음은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를 되돌리거나 무너지게 하는, 절대적인 애정이며, 사랑이고, 신앙이었다.

 

돌아간 시간에서는 다시금 기회가 있을 줄 알았건만, 다시 찾아온 기회는 밀레시안에 의해 뭉개졌다. 신이 손을 놓아버린, 질서를 잃은 세계 아래에서 밀레시안은 자신의 삶이 종식되기를 선언했으니까. 베임네크의 감정이 흐트러뜨린 일의 대가를 밀레시안이 그 자신의 죽음으로 갚고자 했으니. 

 

"나는… 당신이 걱정돼."

 

흐트러진 사랑 고백보다 더 진하게 남은 기억이 그것이었다. 원하지 않는 멸망을 보고, 모든 것이 종식되는 낭떠러지 앞에 선 자에게서 진심 어린 목소리가 떨어질 때, 그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약속한 마지막을 선사해주기 위해 이 생을 함께 마치자고 이야기했을 때. 베임네크는 그 에린의 어떤 자보다도 기쁘고도, 슬픈 존재가 되어있었다. 갈망하고 원하던 것을 손에 쥐고 끝나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관대하며, 동시에 잔인한 처사인지. 하지만 그 마왕은 가장 바라던 것을 손에 쥐고도 욕심을 버릴 줄을 몰랐다. 그를 손에 쥐고, 입 맞추고, 인사하며, 

 

다음 생에라도 너를 손에 쥘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났다. 전생의 기억이 서서히 스며들어 구체화 된 것은 성인을 갓 넘어서였으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며 수없이 도는 굴레 위에 있을 때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그저 작은 인간이 성인이 되는, 아주 짧은 시간. 그러나 그 이후의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공존했다. 그럴 때마다 베임네크는 조각에 손을 대었다. 그를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쏟아내었다. 섬세하고, 또 찬란한 영웅의 조각은 그렇게 몇번이고 빚어졌고, 새로 빚어질 때마다 선명하게 구체화하였다. 베임네크의 시선과 감정과, 모든 기억을 담아서.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기어이 그보다 남에게 먼저 넘겨주지 못해 학교 안에서 졸업이 계속 유예되었다. 모자람 없는 학점도, 성적도, 평판도 그가 졸업을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 흐름에 나름대로 흘러가듯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학관 입구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그를 마주했을 때는, 눈을 두 번이고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수없이 떠올리던 그 얼굴이었으니. 환경이 다르고, 삶이 달라도 그는 그였다. 성격도, 목소리도, 말도, 그의 삶의 태도마저도 이전의 기연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옛날, 그 과거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그의 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짝 쓸어올렸고,

 

"나의 그대.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지."

 

그 머리칼에 입 맞췄다. 

 

전생의 기억을 오롯이 가진 베임네크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기억도 없고 그렇기에 자연스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하던 그가 그 날 이후로 시야에서 애써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평생토록 감정을 속 안으로 눌러 참고 한 번 더 참아 갈등을 제 안에서 갈무리해버리던 그가 다음 생이 되어서야  "이 선배 미친 것 같아"하고 솔직하게 표출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베임네크에겐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기쁨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짊어진 부당한 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모습에 기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 그에게 발을 들였다. 낯선 존재에게 낯설다 말하고, 힘든 일은 적당히 제 손에 밀어가면서, 쉬고 싶을 땐 쉬고, 속삭이는 말에 꼬드겨지기도,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는 그의 평범함을 마음껏 만끽하고 또 사랑하고, 원했다. 이전의 무엇보다 강인하던 그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혹은 그와 같이.

 

그럼에도 저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는 순간에는 이전의 그 눈빛이 되살아난다. '당신을 어째야할지 모르겠어' 하는 그런 눈빛이, 시간이, 숨결이 머무는 것이 완전히 이전 삶의 그와 같았다. 그 수많은 전장 위에서 여유라곤 없던, 가라앉은 붉은 눈과 그가 겹쳐 보이곤 했다. 당신이 걱정된다고 했던…그 말도. 그 손길도. 그러면, 그때는 꼭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흔하디 흔한 소설의 구절처럼 존재감을 느끼지도 못했던 심장이 소리를 내며 뛰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안에 들어차고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아야 했고, 너를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영원토록 기다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어야 했다. 그는 많은 순간 베임네크의 호의에 당황했지만, 베인이 그 속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키고 있었는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와. 선배 예술한댔지."

 

어쩌다 그에게 보여준 작품을 보고 당연하게도 그는 그 자신을 조각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감탄하며 다른 누구도 실물을 보지 못한 베임네크의 가장 아끼는 수작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당연했다. 그것은 영웅인 밀레시안을 조각한 것이었으며, 지금 이곳의 그는 영웅도 무엇도 아닌 그냥 대학생일 뿐이었으니. 베임네크는 손을 뻗어 그의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베임네크 자신도 더는 마왕의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 죽음의 기로에서 묶여있지 않으니 너와 나의 체온은 미적지근했고, 우리는 더는 평생의 삶에 묶여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처럼, 혹은 그들보다 훨씬 더 평범한 삶을 살고, 똑같이 나이를 먹고, 비슷하게 죽어갈 자들이었다. 

 

"참 희한한 일이군…"

"음?"

"그대가 단 하나뿐인 존재라 그리 눈길이 가고 호기심이 새며 매듭을 지어줄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것인데…왜 지금도 이리 사랑스러운지."

"……또 낯뜨거운 소리 한다."

 

눈가를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그의 손을 끌어왔다. 간절하게 잡았던 전생의 어떤 시간처럼, 엄지에 살짝 힘을 줘 누르면 그 굴곡이 낯설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마 무엇보다 낯선 것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온도를 음미하듯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대가 그대이기에 사랑했던 것이기에 그렇겠지. "

 

그대가 밀레시안이나, 영웅이나,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찬연히 스러지는 잔열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45

 

 

* G25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메인스트림의 플레이를 마치고 일독을 권장합니다.

* 베임네크사랑해이제정말시리즈따로파야한다 

 

 

 

 

 

 


 

 

흐름이 멈춘 세계에서 베임네크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것이 멈추지 않는 쳇바퀴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적자의 운명을 받고 자신의 쳇바퀴를 멈춰줘야 할 이는 이미 수없이도 포기하거나 실패했고, 덕분에 진작 끊어졌어야 하는 삶은 비슷한 구간을 몇번이고 맴돌았다.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이 꺼졌다가 과거의 전쟁터로 돌아오면, 그 어떤 권태감보다도 깊고 끝없는 공허감이 몰아쳤다. 그 긴 삶을 살아오는 동안 느낀 모든 감정들은 지치고 지쳐 퇴색되어버리곤 했건만 이 공허감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 언제나 그것은 삶에 묶인 마왕을 끝없이 뒤흔들고 삼켜냈다. 삼켜져 좌절할 법도 하건만, 그는 그 공허감으로 말미암아 되려 간절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가망 없어 보이는 내기를 붙잡고 매달려 계속해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굴레 속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지.

 

무겁고 깊은 계단에 발을 디뎌 내려갔다. 조곤조곤 대화하는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그 모습들이 눈에 밟혔다. 세 사람의 인영. 그중에 유독 검은 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상의 암흑마저 품어버린 것 같은 차분한 검은 빛과 그의 존재감을 선명히 새기는 붉은 빛을 가진 자였다. 테흐두인의 어둠을 뚫고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자신을 마주했을 때, 베임네크는 확신했다.

이 눈부신 자가 바로 자신의 굴레를 끊어줄 구원자임을.

 

 

 

 


 

 

모든 맹약이 거둬졌다. 베임네크는 비로소 자신의 굴레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그것을 해낸 이가 누구인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 균열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겪어 알면서도 기꺼이 겁 없이도 발을 들이던 그, 밀레시안이겠지. 그렇게 들어와서,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검을 맞대주던 그였다. 수없이 끝을 맺어달라고 말해도, 그 간절함을 비쳐 보여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를 망설이는 자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는 숫자만큼 밀레시안의 숨이 끊어졌다. 대부분은 무기를 들지도 않거나, 중요한 순간에 망설였던 까닭이었다. 밀레시안이 누운 자리에서 다시 눈을 뜰 때. 그의 곁에 칼을 꽂고 내려다보는 베임네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날 밤이 생각나는군, 그대."

"그래요. 다를 것 없군요."

"하지만 그때처럼 언젠가 끝나지는 않을 거야. 일어나 그대. 검을 쥐어. 끝을 맺을 시간이야."

 

밀레시안은 답하지 않은 채 시선을 들었다.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가 서로에게 멈춘 채 시간이 흘렀다. 가쁜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고 두 사람이 머문 공기를 적막이 지긋이 눌렀다. 그 속에서 차분히 눈을 감은 후 숨을 고르고 다시 눈꺼플을 들어올린 밀레시안이 마른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날 밤,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요?"

"그대에 관한 일을 내가 잊을 리는 없지. …하지만 그대. 나의 대답도 떠올려줬으면 좋겠는데."

"베임네크."

 

밀레시안은 피로 물든 하얀 손가락으로 그를 밀었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투가 재개되는 것을 알리는 장전 소리가 들리자 베임네크가 땅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날이었다. 붉고, 덥고, 끊임없이 아프기만 한 날이었다. 모든 숨소리에는 밀레시안의 피 냄새가 섞여 있었고, 모든 공격에 피를 보는 것도 오직 그 밀레시안 뿐이었던 그 날. 둘 중 누군가의 밀레시안의 피와 살이 바닥을 구른 덕에 더욱 붉게 물들어가던 반호르의 흙바닥 위. 쉼 없이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며 누군가는 미래를, 누군가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되새기던 날이었다. 시간이 흘러 둘은 다시 마주했다. 모든 밤이 지나갔고, 비로소 끝에 다다른 곳이었다. 이 곳에서 그 날을 떠올렸다. 실린더에 결정을 장전하던 밀레시안이 팔을 내리고, 자신의 맞은편에 선 이를 마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 날, 그 순간 소리로 내지 못하고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던 그 말에 목소리를 실어 내보냈다. 둘 모두의 마음을 짓누르는 말이었다. 자신의 말이 의미없음을 아는 자가, 이 말에 서운함을 품을 자에게.

 

"내가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요."

"이전과 같은 답을 해 주지, …나의 그대."

 

베임네크는 눈꼬리를 떨어뜨리면 퍽 서운한듯 말했다. 그리고 도약했다.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이의 검을 가드실린더로 막아낸 밀레시안의 실린더에서 응축된 불꽃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폭발해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 날과 같았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베임네크는 밀레시안을 몰아붙였다. 몇번의 폭음과 검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서야 베임네크가 입을 열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

"그 실낱같은 기대는 충족되지 않아. 그대… 부디."

 

끝을 맺어 줘. 그것이 입 밖에 나오는 말은 아니었지만, 밀레시안이 그 뜻을 읽기엔 충분했다. 그의 질리도록 긴 삶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그의 표정이 그 멈추지 않는 쳇바퀴 위에서 나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 빛나는 밀레시안을 끝으로써도, 시작으로서도, 혹은 그 삶의 가장 찬란한 빛으로써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끝을 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며 찬란한 것인지... 이제는 정말로 공감한다 말할 수 있었으니.

 

두 사람이 다시 밀려났고. 몇번을 다시 부딪혔다. 바닥에서 화염이 끓어오르고 구름이 멈춘 하늘에서도 번개가 쏟아져 내렸다. 그의 타오르는 눈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밀레시안은 자신이 바란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수없이도 봐온 눈빛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마주한 밀레시안이 한 순간도 체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죽기를 바란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밀레시안이 놓친 많은 이들 중 그 밀레시안이 누군가를 죽여 나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심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었다. 

 

… 그런데도, 그 순간 자신의 끝을 확신했다.

 

그들 모두가 그랬고, 눈앞의 베임네크가 그랬다. 너무도 익숙한 눈빛이었으며, 너무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마주 본던 눈빛과 열기가 훅 가까워지며 날카로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붉은 눈이 닿을 거리에서 마주쳤다. 굉음이 물러가고, 서로에게 대치하는 힘을 남긴 채로 서로의 시선에 오롯이 서로만이 담겼다. 서로를 이따금 덮곤 하던 먼지와 안개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한 줌씩 먹히는 듯 가라앉았고, 검과 방패를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시선과 함께 숨소리가 섞였다. 그 숨소리마저 가라앉을 때 즈음, 거대한 인영이 쓰러졌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래요."

"……."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쓰러진 자의 앞에 선 밀레시안이 가만히 눈을 내리감고 심호흡을 했다. 수많은 것이 속에서 끓어올라 넘쳐흐를 것만 같다고 느꼈다. 이런 끝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가. 한편으로는 확신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해오는 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가졌던가. 그는 죽을 것이다. 세계는 그렇게 흘러왔으므로. 자신은 수많은 이를 죽이거나 잃어가며 여기까지 도달했으므로. …또한, 그에게 그것이 진정한 구원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래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하하…"

 

끈질기게도 서로를 마주하던 시선들이 흐트러졌다. 수많은 감정이 뭉쳐 쏟아질 것만 같았고, 터져버릴 것 같았으며, 죽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며 가슴을 누르고 있을 것 같기도 한. 이 순간이 마지막임에도, 마지막이라서 뱉어낼 수 없는 것들이 각자의 마음에서 조용히 침잠했다. 그 끝에 베임네크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밀레시안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운명을 무엇보다 확신하고 오래도록 그것을 준비해 오면서도, 운명을 거스를 준비 역시 차고 넘치게 하던 자. 버려질 선택지임을 확신하면서도 모든 것을 끌어안는 자였다. 그것이 영원토록 불가능하거나 나아갈 수 없게 무겁거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는 자였다. 그것이 그 스스로를 수없이 깎아내린 경험을 해왔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였다. 이 땅의 무엇보다 고결한 존재여, 

 

"그대는… 너무나도 눈부시군."

 

밀레시안이 그를 내려다봤다. 손을 뻗어 그의 검을 쥐면, 천천히 손이 풀리고 그 검이 손에 쥐어졌다. 놀랍도록 무거운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의 삶을, 미련을, 모든 의미들을 담은 것이었으므로. 공허하던 모든 것을 끊어낼 검이었다. 그의 체온처럼 차디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무게가 버거운 것처럼 팔이 떨렸다. 두려운 것처럼 숨이 흐트러졌다. 

 

모든 것이 끝날 것임을 알았다. 그 순간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자, 우리의 여정을 끌어온 그의 가장 간절한 순간이었다. 수없이 되새겼다. 세계를 위한 것이며, 그를 위한 것이고, 가장 올바른 길이었다고. 그러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침묵이 흘렀다. 베임네크는 검을 들며 감겼던 상대의 눈이 다시 자신의 시선을 마주한 것을 보았다. 오롯이 자신에게 담기는, 오롯이 자신을 담는 눈동자를. 비로소, 지금. 말로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을 담은 슬픔이 제 앞에 떨어지는 것을. 당신을 잃기 싫다는 인간적인 욕망을 종극이 되어서야 쏟아내는 존재를. 어떤 신들보다 단단하고 굵은 모습으로 그 스스로를 단단히 잠그고, 자신보다도 타인에 대해 말하던 존재가, 

 

"나는… 못하겠어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밀레시안은 지금 순간을 후회할 것임을 알았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사라져가는 그를 보며 이번에도 실낱같은 희망은 거짓이었으며 허황한 꿈이었음을 알았다. 주저앉아 그를 마주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눈가를 서늘한 손이 천천히 쓸었다. 그 감각마저 흐릿했고 마주 보는 눈빛 역시 주변의 안개에 삼켜져 감에도 베인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눈에 담겼다. 그리고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하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군……."

 

흩어지는 검은 안개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에 담았다.

스러지는 잔열 위로 후회 섞인 감정이 방울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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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 속의 불협화음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45

 

 

*

G24, 2부의 스포일 수준이 아니라 스크립트 자체와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날조 낭낭해요) 플레이 후 일독을 권합니다.

 

!! 트리거에 주의하세요 !!

유혈보고싶어서 쓴 글입니다. 가학성/잔인함/고어 위주로 쓰여졌습니다.

그 퀘(제목) 특성상 대응하지 않은 채 상해를 입는 밀레시안(피해자)의 시점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 TMI : 밀레시안이 검은 용기사의 날개를 달고 있습니다.. 왜 쓰냐면.. 보시면 압니다.. 

 

최초발행 2020.05.07

폰트수정 2020.05.29

 

 

 

 

 

 

 

시야가 붉었다. 

 

머리를 맞았던가. 아프진 않은 것을 보니 이전의 상처일 수도 있겠다고, 밀레시안은 태연하게 그지없는 생각을 했다. 데이고, 찢기고, 뚫린 상처가 여러 번 생겼지만,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그와의 싸움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어느새 다가온 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타오르는 시선. 그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다. 밀레시안의 앞에 서서… 그 밀레시안을 오롯이 시야 안에 담을 때, 그 순간에 무언가 많은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눈을 했다. 

 

기대감. 고양감. 혹은…쾌감. 저렇게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그 단어들을 그에게 입히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자신의 어떤 면들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지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밀레시안은, 그저 존재했기에 존재했을 뿐인데.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위에 실망감을 덧씌운 얼굴을 한 베임네크가 밀레시안을 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 나를 실망하게 하는군, 그대. "

 

그가 자리에 쓰러질 때마다 숫자를 헤아리던 베임네크는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그 숫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상대가 몇 번씩 생사를 오가는 동안에 한번도 진지하게 검을 뽑지 않았음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그대. 나와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걸 원하지 않나? 내가 이렇게 원하는데…. 슬픈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눈가를, 뺨을, 턱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던 붉은 눈의 밀레시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실망, 하냐고요. 

 

" 대체 내게 무엇을 기대했나요. "

" ……. "

" 베임네크. 내가 당신을…. " 

 

밀레시안의 손이 베임네크의 얼굴에 닿았다. 마주 본 얼굴에 입 모양으로 무어라 속삭이면, 갑옷을 두른 거친 손이 밀레시안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밀레시안의 손이 그 팔을 붙들었지만, 여태 그래왔듯이 그것을 뿌리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대신, 다정히 쓰다듬는 손길만이 있었다.

 

….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소란스러운 반호르에서도 그 소리는 선명했다. 아무리 영웅이라 불리는 이지만 육체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목이 부러지자 마왕의 손에 으스러져 늘어졌다. 그런 그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베임네크는 억지로 끌어올리던 입꼬리가 더는 제 뜻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퍽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 어서 일어나, 나의 그대. 나는 그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

 

끊이지 않는 피와 싸움을 딛고, 그 전쟁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손에 넣었다. 강한 자들을 계속 상대한 끝에, 진정한 끝에 도달했다. 이 마왕은 끝의 성취감보다는 지루함을 느끼는 게 먼저였다. 아니, 성취감이 있었긴 했던가? 이후에는 의미가 없었다. 더 이상 제 흥미를 끌 수 있는 어떤 것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포워르의 왕이 되었지만, 아래에 있는 것들은 해를 거듭해도 같은 일들을 반복할 뿐이었다. 닿지 못하고 추락하는 이들. 의지도 없는 이들. 늘어가는 지루함, 기대도 없던 실망감. 그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그 어떤 마왕의 감정도, 의지도. 그 밖의 여남은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공허 속으로 빠져들게 할 만큼 기나긴 삶이.

 

그 삶에 나타난 것이 그였다. 밀레시안. 끊이지 않는 싸움을 딛고 끝을 모르고 강해지는 자. 죽지 않는 육체를 가진 자. 기우는 세계를 몇 번이나 바로 세우고, 신이 방해물로 여길 정도의 영웅적인 존재. 그를 만나기를, 그와 이렇게 검을 맞대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와의 전투에서는 제 안에서 감정이 흘러넘치는 기분이었고, 공허라곤 한 줌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보다 열정적으로 죽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던 것. 원하던 전투, 시간. 그 모든 것이었다. 그래, 그런 그에게는 그의 태도에 실망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하기 그지없었다. 

 

" …매정한 그대."

 

밀레시안은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다고 생각하며 숨을 내뱉었다. 온몸을 감싸던 통증이 물러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베임네크의 얼굴을 시야에 담는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 태도가 이런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약점을 내보인 건 베임네크, 당신인데.  


" 당신은 패를 너무 일찍 들켰어요, 발로르. "
" 그래, 그렇군. 내가 너무 힌트를 많이 주었나. "

 

그대의 앞에서는 이렇게도 마음이 약해져서야. 베임네크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검을 내리꽂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피부가 찢기는 소리. 밀레시안의 삼켜지는 신음이 들렸다. 그렇다면 다른 즐거움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는 베임네크의 눈에 다시 웃음기가 어렸다. 또 모를 일이지. 그의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가까우니, 인간들이 쉽사리 패배하고 마는 지긋지긋한 고통에 가두면 전의를 회복할지.

 

 

 

 

고어에 주의하세요! 신체훼손의 직접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

 

 


 

검이 뚫은 상처에 손을 뻗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피부는 쉽게 갈라져 속을 내보였다. 으스러진 뼛조각, 굵은 혈관들. 죽지 않고 움직이는 살덩어리들. 왈칵 솟구치는 피가 그의 검은 갑옷과 얼굴에 튀었다. 고통에 바르작대던 밀레시안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쥔 것 같았지만 잠깐이었다. 서서히 힘을 잃어간다. 하지만 육체가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다. 벌어진 가슴 사이로 생생하게 뛰는 심장을 눈에 담으며 발로르는 작게 웃었다. 

 

" 생기가 넘쳐. 그대의 얼굴에서는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없었는데. "

" ……. " 

" 언제나 그대는 어딘가 통달한 것처럼 보였지. 당연하게 도와달라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 이유마저 그대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어. 그저 운명에 따르는 빈껍데기처럼…. 그런 그대가 나와 다른 것이 있나? "

 

베임네크의 서늘한 손이 고동하는 심장 위를 쓸고, 손에 쥐었다. 그렇다고 그의 존재를 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질적이로 생동감 넘쳤으므로. 그는 손에 쥔 심장을 들어 올렸다. 이어진 것들이 툭, 툭 끊어지며 피를 쏟았고, 밀레시안은 숨이 멎는 것을 느낀다. 이질적으로 뛰는 자신의 심장을 눈앞에 두고, 베임네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 밀레시안. 그대가 이렇게 심장이 뛴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지 않나.  "

 

마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베임네크가 중얼댔다. 멈춘 심장 위에 입 맞추고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곧 그는 다시 일어나서 이 고통을 계속할 것이었다.

 

 

 


 

몇 번이나 숨이 멎었던가. 헤아릴 수 없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피로 흥건히 젖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던 차에, 몸을 뚫는 격통을 느꼈다. 수십번도 더 뚫리고, 피를 쏟는 몸 위를 베임네크의 몸이 누르고 올라왔다. 심장을 뜯고, 사지를 잘라내고, 목을 비틀고. 또 어땠더라… 지금, 지금은.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낮은 비명이, 신음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핏줄기에 먹혀들었다. 

 

" 그대, 그만 참는 게 어때. 그대가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내 마음이 아플 지경이야. " 

 

응? 나긋한 숨소리가 귓가에, 목덜미에, 어깻죽지에 내려앉았다. 조르듯, 재촉하듯 뱉는 말들이 애처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베임네크의 검은 갑옷에 감긴 손이 밀레시안의 몸 위를 쓸었다. 몇 번을 으스러뜨려도 일어나는, 일어나서 운명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이를. 더듬는 손은 이내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멈춰 섰다. 곧 부러질 것 같은 날개는 그 몸에 뿌리를 내리고, 그 몸에서 흐른 피를 머금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베임네크는 시선을 들어 붉은 눈으로 그 날개를 훑었다. …문을 연 자의 날개인가. 조용히 중얼거리면, 밀레시안이 반응했다. 

 

" ……. "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 존재의 붉은 눈이 마주했고, 베임네크의 눈이 휘어 웃음 지었다. 공허한 눈빛에서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베임네크의 손이 그 날개의 뿌리에 가 닿았다. 손에 힘을 주고, 그 날갯죽지를 뽑아낸다. 투둑, 툭….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 피가 떨어지는 소리. …지고한 영웅의 짧은 비명. 그것이 전부인 짧은 순간이었지만, 베임네크는 오늘 한 행동 중에 그나마 가장 의미 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개를 잡을 때, 쥐어볼 때, 뽑아내는 모든 순간에 밀레시안은 잘게 반응했다. 고통 안에서도 감정을 숨겼다가, 내비쳤다가, 아주 잠깐은 말리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날개가 세 개만 있었어도 그가 검을 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임네크는 비틀린 생각을 했다. 질투 같은 모양을 했다. 수많은 고통을 주어도, 이렇게 간절히 애원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이가, 육체의 고통 외의 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그렇게 흔들리게 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라는 것이 이토록 실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베어냈다. 말을 못 하는 모양으로. 짓밟고, 죽이고, 숨통을 끊어둔다. 그의 주변에 알 수 없는 빛과 함께 그가 부활하면, 그 아래 불을 피워 태워죽였고, 다시 눈을 뜨면 목을 베고, 다시 눈을 뜨면 사지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고통 속에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은 걸 확신하는데. 그런데도. 

 

" …여유가 없어 보여요, 발로르. " 

 

자신의 목을 쥔 그를 보며 밀레시안이 흐리게 웃었다.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된 사지에서 고통이 일었다.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땅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자에게는 낯설지도 모르는 고통이었다. 일방적인 폭력, 살해. 그 사이사이에 이어진 속삭임들.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숨이 끊어지면 고통이 물러갔고, 이어지면 다시금 닥쳐왔다. 지옥 불에 던져지면 이런 느낌일까. 아득함 속에 밀레시안은 생각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발로르 베임네크는 퍽 슬픈 표정을 했다. 

 

"그대. 이제 그만 포기하고 검을 쥐지 그래."

 

응? 애처롭기까지한 목소리가 귓가에 앉았다. 이어서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곧 죽겠지. 숨이 끊어지는 순간은 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것이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육체의 고통으로는 밀레시안을 설득해낼 수 없었다. 고통은 언젠가 끝나는 것이었다. 부활하면 그만이었고, 치료하면 그만이었고. 아프던 순간은 길고 많았지만, 그것을 되짚어서 고통이 되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든지 견뎌내면, 견뎌낼 만한 일이었다.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대는 알잖아…나를 이해하지 않나?"

 

우리는 닮았어. 이 공허가 무엇인지 그대는 알고 있잖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세상의 정상에 선 이의 공허함이 묻어나는 그 말이었다, 자신을 동정해달라고, 이해해달라고. 이해하고 나를 위해 칼을 뽑아달라 간절하게 뱉는 그 말이었다. 우리가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올곧은 세상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이 공허함 대신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가 말하던 의미 없는 꿈을 떠올리고 만다. 그것을 이뤄줄 수 없다면 그저, 그의 간절함 하나 정도는 이뤄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만다.  

 

제 목을 쥐고 떨리는 검고, 단단한 손 위를 밀레시안이 쓸었다. 

꽤 오랜 시간 전. 수십번 죽어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밀레시안은 끝을 예상했다.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그가 겪은 모든 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세상의 많은 것이 그 손에 달려있다. 그 끝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 세상은 제 곁에 남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늘 잃어왔다. 죽이기도 했고, 손쓸새 없이 놓치기도 했다. 당신이 그 손으로 뽑은 날개는, 내 유일한 오점의 흔적이었다. 지고한 영웅이라고. 그 영웅은 이렇게 실수를, 잘못을 반복하는 이였다. 아마 나는 당신을 죽이게 되겠지. 그것이 실수인지,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인지, 오점인지. 수십번을 되짚으면서 고통받게 되겠지. 

 

또 나는 이렇게 안타까운 꼴을 하는 당신을 구하지 못하고 그것이 최선이었다 위로받겠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왜 이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더라. 왜 당신에게 맞서 싸우지 않았더라. 수십 번을 죽어서인지 무엇 하나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흐려진다. 여지껏 검을 쥔 적 없는 밀레시안은 지금, 이 순간 이제와서야 전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끝에 말했다. 당신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는. 

 

" … 미안해요. "

 

어차피 그때가 올 거라면, 최대한 미루고 싶어. 그게 내 욕심이라도 말이에요.

제 목을 감싼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밀레시안은 뱉지 못한 말을 안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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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ission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43

 

 

 

*

마비노기 아포칼립스 클라이막스(G24) 1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메인스트림의 플레이를 마친 후에 일독을 권합니다.

 

반호르에서 마주친 베임네크....답록 아니..아님.. 그냥 제 밀레 반응을 쓰고싶었을 뿐인데요

읽는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 같아서 베인밀레라고 우겨봄(후레라서죄송합니다)

 

2020. 04. 20 최초발행

2020. 05. 24 수정발행

 

 

 

 

 

 

 

 


 

 

밀레시안은 제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과, 그 손길을 따라가는 눈동자를 가만히 보았다. 발로르 베임네크. 수  많은 시간을 갈증 안에서 살았던 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만족감을 얻고 있는지는 그 눈동자를 마주보면 알고도 남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어떤 형태인지에는 알 수 없다고 표현했지만, 이렇게 선명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밀레시안이 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원하는 형태와는 너무도 확연하게 달랐다. 그러니까,  

 

....안타깝다고 할까.

 

아마 당신은 모를 것이다. 이 지고한 영웅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큰 사랑을 품어야 했는지를.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아무리 소중한 것을 내밀어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잊곤 하는 안타까운 낙원에 갇힌 이들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를. 여러 말로 돌려서 결국 이용하는 사람도, 스스로 나아가지 않고 기대는 사람도, 책임을 넘기고 감사하다는 말로 일갈하는 사람도, 수많은 것을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그리고는 두렵다는 말로 밀어내 버리는 사람도,

 

심지어는,

그를 배신하거나 끝없이 증오했던 사람마저,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해 왔는지를. 

 

적이 되어 마주 보는 위치에서라고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베임네크가 밀레시안에게 들린 책임이 지나치다고 말해왔지만, 그 밀레시안은 본인이 개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신과 같다고 말했지만, 그보다 더..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세계와 같다. 누군가가 책임을 다하지 않고 어긋나버린 것의… 제자리를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러니, 어쩌면 그 존재가 사랑을 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당신이 예외가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그런 꿈결 같은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겠지." 

 

…이렇게 안타까운 자인데. 

 

그렇게 말을 뱉는 그를 보던 밀레시안의 붉은 눈이 더 마주 보지 못하고 떨어졌다. 제 턱에 닿은, 서늘한 손을 끌어올렸다. 그 손등 위에는 미적지근한 온도를 가진 밀레시안의 손이 겹쳐지고, 손바닥에는 기울여 기대오는 뺨의 온도가 닿았다. 한숨 쉬는 작은 숨결도, 기울어지는 검은 머리카락도. 베임네크는 밀레시안을 응시했다. 꼭 손에 쥐고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까지 아득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랬으면 좋았겠어요. 이 엉망인 세계에서 내가 구하며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동안, 마음을 수천, 수만 조각으로 쪼개는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텐데."

 

안타까운 탄식처럼 느끼는 뱉어낸 밀레시안이 시선을 들어 올리면, 두 눈동자가 마주했다. 

 

밀레시안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떠올리고 만다. 이미 설정된 극단적인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고통을 덜어주기도 하는 수만의 감정들. 그리고 비극의 끝에 보이는 것은 적막과 어둠뿐인. 우리는 비극의 무대 위에 오른 주인공들이었다. 그 무대 위에서 말하는 희극이라니, 이렇게 의미 없는 것이 또 있을까.

 

밀레시안의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면, 베임네크는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의미 없는 꿈을 꾸었군, 그대."

"당신도 마찬가지군요."

"그래. 하지만 같은 꿈을 꾸지는 않았겠지." 

"...너무 잘 아네요." 

 

희극의 꿈을 꾼다면, 그래. 곁에 당신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롯이 당신뿐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흥미로운 자가 아니던가, 밀레시안이란.

 

 여태껏 수많은 일을 겪은 영웅은 이 그 적막과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을 것을 알았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이는 자신이 어떤 끝을 맺을지 알았다. 이미 시작된 연극은 지금의 짧은 인터미션을 지나면 다시는 멈추지 않겠지. 

 

그것을 위해 영웅은 칼을 뽑아야 했다. 

이전의 비극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밀레시안은 제 뺨에 닿아있던 손을 잡아 내렸다. 하지만 손을 놓는 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가 비극의 주인공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떨쳐내기에, 이 지고한 영웅의 마음은 너무 나약했는지.

 

아니면, 그 수만개로 쪼개진 마음 중 하나쯤 그에게로 넘어가 버렸는지.

 

 

 

 

[베얀] 지겹도록 익숙한 것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29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조용히 식기들이 맞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이후 목소리는 끊긴 지 오래다. 얀은 농도 짙은 기시감을 느낀다. 묘하게 입맛에 맞는 식사.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시선. 그 오래 전, 안개 속에서 맞부딪혔던 와인잔을 떠올린다. 얀이 무언가를 할 때에 베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고기를 자르는 칼끝도, 그 칼을 쥔 손가락도, 음식을 들어 올리는 손목이나 음식을 삼키는 입술까지도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주 오래 전 시간의 안개에 흐려진 첫 만남 때부터 그러했다. 안개 속에서도, 다른 시간대 다른 삶에서 기억이 없을 때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혹은 그렇지 않은 듯, 그렇지 않은 것을 가장한 듯. 그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아래의 감정은 읽을 수 없다. 사랑이 오가지 않을 때의 그는 어떠했던가. 자신의 눈에 사랑이 덧씌워져 있는 지금은 그 과거의 기억과 대조해도 다를 것이란 없었다. 그 무엇도 익숙하기 짝이 없고, 익숙한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몇번의, 몇십번의, 어쩌면 그보다 더한 셀 수 없는 시간을 윤회하는 동안에도.

 

사랑하는 것을 잊는다면 그것은 과연 축복인가. 그 물음을 떠올렸다면 소모적인 싸움은 오가지 않았을 텐데. 둘 중 누구도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고통은 눈을 가리고 마음의 여유를 삼켰다. 거대한 바위도 깎아내리는 시간에 인간의 형태를 한 정신이 바스러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기억을, 그 시간을 서로 기대기만 했어도 덜어지던 것들이 각자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저 그것을 깨달으면 되었다. 

 

그 짧은 식사 시간을 붙잡고 늘어지면서도, 왜 그런 것들은 진작 떠올리지 못했을까. 베인은 휩쓸려가 버린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수 없이 괴로워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반려에게 얼마나 많은 거짓을 이야기했던가.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었던가. 몇 번의 이별, 몇 번의 재회 속에서도 오직 아르얀로드와 함께 있는 시간만이 유효하게 느껴졌는데. 

 

너무, 너무 오래 헤매었다. 그걸로 충분한데도.

 

베임네크의 손이 얀의 머리칼을 쓸었다. 절망을 말하던 의식적인 손길과는 대조되는 무의식적인 손길. 얀은 시선을 들지 않아도 그것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손을 뻗을 때 어떤 얼굴인지, 어느 정도의 높이 위에 있는지. 마주 보면 어떻게 웃을지. 어떤 목소리로 말을 걸어올지. 그 말끝에 맺힌 웃음소리까지도. 이 유예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고 끝을 맺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임을 알았다. 어쩐지 숨이 멎을 듯, 숨이 찰 듯 벅찬 마음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괜히 퉁명스러운 소리로 내뱉었다.

 

"치료 중일 때만이라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얌전히 있지 않았나?"

"… 이쪽 팔만 움직였대도, 이쪽 팔을 치료 중이잖아."

 

팔을 잡아 내린다. 반박하는 목소리 끝에 웃음소리가 걸려있다. 팔을 잡아 내리는 손길에도, 흐트러진 붕대를 보고 있는 눈길까지도 시선이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랑스럽다는 듯, 숨기거나 거짓 없이. 베임네크는 그 시선으로 부족하다는 듯 얀을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인 그의 숨결이 얀의 목덜미에 가 닿았다. 결코 끝나지 않는 시간. 오랜 시간을 넘어 재회한 것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요란한 심장 소리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제 몸처럼 익숙한 것들이 지겨워지지도 않는다. 비로소 기대어진 두 시간은 겨우 안정을 찾을 것이다.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군."

 

편안한 숨에 말이 섞였다. 익숙하지 않은 안도감이 익숙한 체온을 타고 번져갔다. 

 

"다시 당신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겠어." 

 

둘은 잊히지 못한 모든 기억 속에서 재회하던 모든 시간을 떠올렸다. 언젠가 다시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해도, 언젠가는 다시 이 안정을 찾을 것이다. 모든 것이 바뀌어도, 당신에 대한 기억과 감정만은 변하지 않으므로. 물감을 발라 접었다 편 것처럼 꼭 닮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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