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루에] 죽음에 젖은 목소리

마비노기 2차/밀레루에2023. 3. 2. 03:04

* 죽음, 상해 묘사가 적나라합니다!
 
 
 
 
 
붉게 젖은 시야가 요동쳤다. 사람을 찌를 용도가 아닌 끝이 뭉툭한 검이 복부를 파고들면서 생긴 통증 때문이었다. 으레 관통상은 검을 뽑을 때까지는 출혈이 크지 않다지만, 이것은 상황이 달랐다. 피가 빠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밀레시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울음과 같은, 고통의 신음과 같은.
 
"인사가… 좀 거칠다, 루에리."
 
보고 싶었는데 너무하네. 실없는 소리. 뭐 하나 흔들리지 않는 음절이 없고, 말과 말 사이에 숨소리와 신음이 얽혀 들어간다. 고통을 가늠하듯 떨어진 고개와, 어딘가 고장 난 몸에서 역류해 입가에 흐르는 피. 평범한 인간이라면 출혈만으로도 충분히 죽었을 것이다. 루에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검을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틀지도 않은 채로 그를 바라봤다. 그가 검신을 붙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그 힘으로 겨우 버티고 서있을 테지.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든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루에리." 죽음에 젖은 목소리….
 
하지만 그는 죽지는 않았다. 루에리는 언제나 그와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지만, 그는 죽지는 않았다. 아무리 짓밟고 베어도, 찌르고 부숴트려도. 가끔은 숨이 끊어지는 걸 목도하거나 느껴도 늘 그는 다시 목소리를 찾고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의 의지를 꺾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검에 의지를 잃고 놓는다면, 그것으로 복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가 너를 상냥하게 대할 이유는 없다, 밀레시안."
"하하……."
 
말이 끊어진다. 시선이 잠시 흐려져 떨어졌다가, 천천히 기어올라왔다. "그건 그래." 잠긴 목소리. 저 졸음은 죽음임을 알았다.
 
그런 모습을 너무나도 오래 봐 왔다. 그는 루에리 자신과의 싸움이 아닌, 수많은 다른 일들에서도 수없이 죽고, 수없이 깨어난다. 그리고 무기를 쥐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은 대부분 옳은 결과를 냈다. 그가 선택한 길은 트리아나를, 리안을 해했을 때와는 다른 것임을 루에리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복수를 멈추지 않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어쩌면 모든 것이 오해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스러운 진실을.
 
그 진실을 외면하는 동안, 복수의 굴레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피로 얼룩진 승기를 든다. 그럼에도 완성되지 못하는 복수, 쌓이는 모순. 그 모순 속에서 가끔 루에리는 궁금했다. 
 
"밀레시안."
 
왜, 이 모순의 파훼법을 아는 그는 입을 닫고 있는지.
 
"너는,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
 
그러자 숨이 꺼져가는 이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은빛 눈동자는 느리게 초점을 찾는다. 아직 죽어줄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아 보였다. 흐트러지는 숨을 뱉어도 정돈되지 않음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밀레시안은, 조금 눈을 깜빡였고……루에리는, 그가 죽는다고 생각했다. 때가 왔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순간, 그 대신 기습적으로 검신을 잡아당기는 힘에 끌려갔다.
 
잡아당겨진 검신이 더 깊게 상처를 후벼 파고, 피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기 자신의 배를 가르는 행위였음에, 오히려 루에리의 눈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그러나 그 붉은 시선이 상처부위로 떨어지기 전에, 훅 가까워진 은빛 눈동자가 눈을 응시했다. 붉은색이 비쳐서일까, 피에 젖어서일까. 유독…….
 
"나는 이대로도 좋아."
"……! 밀레시안!"
 
차갑게 식은 손이 대검의 검자루를 잡으면, 그것이 비틀리는 게 느껴졌다. 생살이 찢어지는 생생한 감각이 원치 않게 손에 감긴다. 루에리가 저항해도, 그가 고통의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 행위는 쉽게 멈출 줄을 몰랐다. 
 
"네가 나를 죽여준다는데."
"… 미쳤군. 놔라."
"끝까지 쫓아와준다는데."
 
못할게 뭐야. 모든 음절에 떨림이 섞인다. 피가 검을 타고 흘러내려 루에리의 손에 닿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떨어지는 피의 온도. 이미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처럼, 그 숨소리는 꼭 죽을 것처럼 멎어 들었다. "루에리." 그의 손이 루에리의 얼굴로 올라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소중한 것을 감싸듯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 그리고…
 
"나를 죽여"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너의 분노가 모두 사그라들 때까지. 

그 말 끝에 꺼져가는 숨이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루에리는 순간 그가 여태껏 해왔던 것들을 깨닫고 만다. 모든 것을 빼앗고, 자신을 복수의 길로 밀어 넣은 사람. 손끝에 죽음의 감각을 익숙할 정도로 새기는 사람. 그러나 단 한 번도 성공을 제게 쥐어준 적 없는 사람. 

그 모든 것이 그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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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루에] 루에리에게 초콜릿을 먹이고 싶어

마비노기 2차/밀레루에2023. 2. 26. 03:38

 
 
 
 


 

“루에리. 바쁜가?”

목소리를 앞세워 다가온 밀레시안이 그 옆에 털썩 앉았다. 묻는 것은 그저 짧은 예의일 뿐인 모양이었다. 루에리는 손질하던 검을 내려놓고 그를 돌아본다. "왜." 그러자 그 질문 앞에 장작 몇 개가 턱 하니 넘어왔다. "모닥불 좀 피워주라." 그 뻔뻔스러움을 가는 눈으로 보던 루에리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장작을 받아 들었다. 어차피 슬슬 피우려던 참이었으니.

툭툭 떨궈 불을 피워내고, 루에리는 아까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바로 인접한 거리에서 밀레시안이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마 미뤄뒀던 가방 정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가방에 내용물을 넣어놓으면 안에서 뒤섞이는 게 정상이지 않냐는 질문은 이전에 했었고 ‘넌 뭘 모른다’따위의 답이나 돌아왔으니 그걸 다시 묻지는 않았다-묻고싶기는 했다-. 대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밀레시안은 몇 가지를 밖으로 꺼내서 분류하고 담는 것을 반복하고, 몇 가지는 모닥불에 던져서 태우고 있었다. 쓸데없는 것들을 꺼내 던져 넣으며 그가 변명처럼 말했다. 

“요새 여기저기 많이 다녀서 뭔가 많다.”
“그렇게 뒤섞이는 게 싫으면 그렇게 많이 들고다니지 않으면 된다만.”
“……그건 어떻게 하는데?”
“………….”

그의 되물음에 루에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다운 답이라고 생각해서 한숨을 내쉴 뿐, 다른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뭉개고 가는 말들이 쌓여서 산이 되어버리기 전에 불에 태워버려야 할 텐데. 그 마음을 담아 루에리가 모닥불에 장작을 두어 개 던져 넣었고, 쓰레기를 태우느라 일어났던 밀레시안이 그 옆으로 돌아왔다. 몸을 움직이면 닿을 거리. 어느새 가까워진 거리가 새삼 실감되었다. 모닥불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어색한 침묵이 진공상태처럼 짓눌려왔던 시간을 생각하면, 같은 관계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만 아직도 가끔은 그에게 칼을 들이밀고 싶었다. 손을 뻗어 숨을 내쉬는 기관을 틀어막고, 목을 부러뜨리면서 그에게 빼앗긴 인연의 이름을 말하는 상상을 한다. 그 이름도, 자신의 분노도, 슬픔도……. 그러나 동시에 그럴 수 없기도 했다. 가끔 그는 입을 맞춰오곤 했고, 눈을 맞추면 애정이 읽히기도 했고, 닿은 체온은 따듯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것들이 사뭇 익숙해져 있다. 루에리는 아직도 그런 꿈에 시달렸다. 그가 더 이상 복수의 대상이 아니라…는. 

어느 쪽이 자신의 진짜 감정인지 루에리는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했지만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는 더이상 좇고 쫓기는 먼 거리에 존재하지는 않았다. 추상적인 복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도, 자신도 사람이었고 사람 사이에 있을법한 감정들 중 몇 가지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조금 더 무겁고, 조금 더 두려울 뿐이다. 그래, 그저 그런 것뿐이니 자신이 혼란스러운 건 이상한 점은 아니라고. 또다시 생각을 뭉갠다. 이 모든 것이 쌓이지 않고 소멸되기를 바란다. 

“루에리.”

생각의 끝자락에 들리는 목소리에 루에리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보고 있는 회빛 눈과 마주쳤다. 방금까지 한 상념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것을 평소에 생각하고 있기나 한지 아닌지. 참 태평한 낯짝이다. “이거 봐.” 손 앞에 흔드는 초콜릿 포장 까지도 말이다.

“좋아해?”

옛날에…마리가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초콜릿을 흔들면 쑥 올라오던 작은 손을 기억했다. 손을 뒤로 빼며 놀리던 목소리와, 들려오던 짜증과 옅은 웃음소리를. 루에리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밀레시안이 똑같은 모양새로 초콜릿을 든 손을 뒤로 뺐다. 루에리는 어릴 적 마리처럼 몸이 휘청이지는 않았다. 대신 밀레시안을 바라봤다.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못 먹지는 않아?”
“아마도.”

그런 태평한 것들과 멀리 떨어져 산 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밀레시안은 생각했다. 하긴, 밸런타인이라는 것도 밀레시안들의 축제지, 그와는 관계없는 것일 테다. 밀레시안은 초콜릿의 포장지를 뜯어 초콜릿 하나를 꺼냈고, “음.” 잠시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하나 나눠 먹을래?”
“굳이?”
“굳이. 완전 수작질이거든.”

그리고 밀레시안은 자신의 입에 초콜릭 하나를 물고, 뻔뻔스레 턱을 내밀었다. “싫으면 말고.” 뭉개진 소리. 그럼에도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기다리는 꼴이, 루에리가 휘말려 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루에리가 기가 차다는 듯 초콜릿에 손을 올렸는데, 순간 밀레시안이 그 손을 낚아채고 루에리의 턱을 잡아당겨왔다. 

나눠먹자는 그 말처럼, 밀레시안이 물고 있던 초콜릿을 루에리의 벌린 입 사이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루에리는 막연하게 반 갈라 먹는 줄 알았던 것이 착각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잡은 턱을 놓지 않은 채 혀에 달라붙은 초콜릿을 문지르고 혀를 빨아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체온에 녹은 초콜릿이 혀 사이로 흘러내리고, 목으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스러운 감각에 루에리가 그의 어깨를 꾹 눌러 밀어내려고 했으나, 어쩐지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그 혀놀림을 따라가기 어려워서인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단맛 때문인지, 손바닥이 간지러워지는 듯한 감각 때문인지. 손에 힘을 쥘 수가 없어서, 그 옷자락을 붙잡고 떨어지길 기다렸다. 초콜릿이 다 녹고, 혀가 맞닿으면 그것이 더 자극적인 것을 잠시 잊고 말이다. 

떨어질 줄 알았던 입맞춤이 이어진다. 아쉽다는 듯, 입안에 숨겨진 단맛을 찾기라도 하려는 듯 안쪽까지 침범하는 혀는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미미한 단향은 아무리 빨아도 사라지지 않았고, 길어지는 입맞춤에 숨이 높아졌다. 둘은 그렇게 잠시 체온과 숨을 나눴다. 키스는 질병에 가장 취약한 행위라고, 입맞춤은 그 최악의 질병까지 나눌만큼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했던가. 루에리는 조금 복잡한 심정이었다. 삶을 다 태워서라도 하는 복수와 다름이 없는 꼴 아닌가. 

밀레시안은 입술을 뗄 때 결국 그 복잡한 얼굴을 마주했다. 그것을 다 읽어낼 수는 없어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잠시 숨소리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던 두사람 중 밀레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댔나.”
“언제까지고 감정과 생각을 뭉개고 갈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 …그래서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도. ”

밀레시안이 잠깐 말을 멈췄고, 다시 고개를 낮춰 그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눈이 천천히 감겼다 올라가면 온도가 다른 시선이 정확히 마주했다.

“지금 순간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루에리는 지금, 이 달달한 향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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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얀] 베인에게 초콜렛을 먹이고 싶어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3. 2. 13. 16:50

 

 


 

영원을 사는 이에게도 시기를 인식하게 되는 날이 일 년에 몇 번쯤은 존재했다. 계절이 바뀔 때, 연도가 바뀔 때, 특별한 날이 되었을 때 같은 날들 말이다. 요즘 같은 시기도 딱 그런 때였다. 인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던바튼 가득 단내가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렌타인. 그 문화의 기원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지만 밀레시안들 사이에는 명절 때보다도 떠들썩한 때였다. 수많은 밀레시안들이 자신의 소중한 누군가 혹은 소중한 지갑을 위해 초콜릿을 만들었고, 형형색색으로 포장한 포장지들이 거리의 가판대에 놓였다. 그러면 밀레시안들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아마 자신도 만들었을─ 남의 초콜릿을 서슴없이 사서 가방에 밀어 넣었다. 포장지의 색이 중요하다나 뭐라나. 에린의 주민들은 이해 못 하는 얼굴이었지만, 얀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 사이에 섞여 가판대를 눈으로 훑었다. 

 

분명 구경만 할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에 있는 어떤 상자를 내려다보고 아르얀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서고 말았다. 푸른빛과 분홍빛 사이, 은은한 보랏빛을 한 그 익숙한 색은 다름 아닌 자신을 이루는 색과 가장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멈춰서 저도 모르게 손끝에 걸린 포장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전에 챙긴 적이 있던가.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챙기지 않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고 잊은 것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이 손가락에 매달려서 쥔 것을 쉬이 놓지 못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아르얀로드가 생각나게 하는 색의 포장지를 받을 베임네크도. 그것을 내려다보고 따라붙을 이해 못 하는 시선도.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나면, 얀은 기꺼이 값을 치르고 예쁘게 포장한 초콜릿을 넘겨받았다.

 

뻔히 몰라줄 것을 알면서도, 그 얼굴이 또 좋아서 사고 싶은 것은 무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리고 얀은 예상했던 표정을 마주했다. 차라리 포장지를 보았을 때는 그대가 선물로 고를 법 한 것 같다며 웃었는데. 내용물이 초콜릿인걸 알고서는 조금 의아해했다. 먹지도 않는 자들인 것은 둘째 치고, 가끔 간식을 먹어도 이렇게까지 자극적인 간식을 먹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 이니까."라고 설명을 덧붙여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뭇 인간들이 챙기는 하루하루를 신경 쓰지 않은 것은 한 두 해가 아니기 때문에. 

 

"역시나 의미를 모르겠네만."

 

그러나 썩 나쁘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얀이 주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좋아라 할 자이기에 그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의문을 표현하듯 갸우뚱하는 시선이 포장된 초콜렛에 다시 떨어졌다. 포장지 때문인지, 먹을 생각이 없어서인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은 시선이다. 

 

"그냥 주고싶었어. …이런 거, 해본 적 없으니까."

 

그러자 그제야 베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포장을 뜯기 고민하는 손을 거쳐, 얀이 포장을 직접 뜯어주었다. 리본을 풀고, 포장을

뜯고, 상자를 열자 바로 달큼한 향이 올라온다. 예쁘게 치장된 초콜릿들 중 하나를 집어 올리자 검은 초콜렛 위에 온갖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얀은 와중에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는 걸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이런 사소하기 짝이 없는 색깔 조합 따위를 좋아하는 것은 고작 밀레시안 정도니까. 그런데도 베인은 그 손에 들린 초콜릿을 보고 조금 소리 내 웃었다. "딱 그대가 고른 모양이군." 포장지 안쪽을 보지 않고 사 왔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나만."

"그대가 원한다면 깨끗이 비워줄 수도 있네만"

"그건 좀 후회할 걸."

 

얀이 웃으면서 초콜릿을 베인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아." 하고. 아이를 어르듯 말하자 소리 내 웃은 베인이 입을 벌려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입술이 손끝을 스치고 가면, 간질거림이 손끝에 남는다. 

 

딱히 베인이 눈에 띄는 변화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었는데. 우물거리는 표정이 조금 미묘해지는 것이 보였다. 평생 이런 것을 먹은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일 텐데, 그 표정이 신기하고 새로워서 얀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사실 이래서 그렇게 고민 끝에 집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새로운 모습은 아직도 발견할 것이 많았고, 또 그때마다 모든게 사랑스러웠으므로. 

 

"별로야?"

"그대는 즐거워 보이는군?"

"그야, 당신 표정이…"

"우스운가?"

"그건 아니고."

"그럼?"

 

말꼬리를 붙잡는 말에 단내가 난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게, 초콜릿에 취약한 체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그건 또 그것대로 귀엽지 않은가. 얀은 생각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고작, 이렇게 달달한 초콜렛 하나로. 베인의 불만스러운 표정조차 퍽 마음에 들었다. 

 

"이건… 혼자는 한 개도 다 못 먹겠군."

"이제 됐……"

 

그러니 나눠먹으면 딱 알맞겠다고. 말을 끊고 닿은 입맞춤이 떨어진 뒤에야 베인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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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된 낙원

마비노기 2차/밀레루에2022. 12. 25. 03:19





* * *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충돌음이 울렸다.

양손 둔기를 쓰는 그 밀레시안은 그 무기 자체의 무게와 충돌하는 양쪽의 힘을 함께 견디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는 그것을 웃도는 힘으로 찍어눌러 상대를 제압하기도 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자로써는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금 충돌했을 때 밀레시안, 아서의 무기가 저 멀리 날아갔다. 상대의 검술이 대하기 까다로워서인지, 그 잠깐 순간에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했었는지. 그 묵직한 철제 무기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순간 아서가 손에서 무기를 놓았다. 저 멀리 날아간 무기가 어딘가 충돌해 바윗덩어리 같은 것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하." 한숨 비슷한 것을 뱉는다. 그리고 맨몸으로 상대에게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구르고, 몇 번의 타격음이 이어졌다. 이내 루에리가 쥐었던 검도 그 손을 떠나 어딘가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손에서 무기를 잃은 둘은 그 흔한 마법이나 이름이 붙은 다른 기술들로 싸우는 대신 그저 맨몸으로 주먹을 주고받았다. 마치 동네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 사이에 싸움이 터져 쥐어박는 것 같다가도, 그 무시무시한 힘으로 머리라도 깨어버릴 듯 처박거나 부러뜨릴 듯 힘을 주기도 했다. 엎치락뒤치락 싸우던 끝에 누군가가 우위를 선점한다. 붉은 눈과 붉은 머리를 가진 상대가 아서의 위에 올라타서 멱살을 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걸로 되겠어? 아주 죽이고 싶다며."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웃음기를 띠는 목소리로 아서가 말했다. 격렬한 싸움, 혹은 다툼. 혹은 목숨을 건 전투에 긴장된 숨소리가 걸린 채였지만, 동시에 여유로웠다. 죽지 않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

그 여유 때문인지, 도발하는 듯한 말 때문이었는지. 루에리의 손이 내려오려다 멈췄다. 그리고 대답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연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전에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던 것이 수없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고 싶었던 분노의 외침이 전부 터져 나오지 못한 것 같았는데. 막상 그 앞에서 무엇도 뱉을 수가 없다. 그 주먹이라도 다시금 내지르면 편해질까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도 없었다. 이 자는 그럴듯한 변명도 더한 도발도 해오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대신, 루에리가 잠시 망설이는 그 틈을 타 아서가 로브 자락을 쥐고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루에리의 몸을 힘으로 밀치고, 무게로 짓눌러 자세를 역전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어 웃는 눈꼬리가 루에리의 시선에서는 증오스럽기 그지없었다. 트리아나를, 리안을 앗아갔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나?

"자기야, 그렇게 방심하다가 네가 먼저 죽어.“
"나까지 죽이기라도 할 건가? 네가 죽인 다른 사람들처럼?"

그 말이 어떤 트리거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 침묵이 감돈다. 하지만 그처럼 방심하지는 않았다. 흐릿한 색의 시선이 선명하기 그지없는 붉은 눈을 들여다보고, 어깨를 누르는 손에 우악스러운 힘이 실린다. 평범한 인간의 뼈 몇 마디, 목숨 하나 정도는 쉽사리 끊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다. 신성이나 마나를 쓰지 않아도, 오롯이 가진 힘만으로도 아서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일직선으로 흘러갔던 과거에서는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상대였지만, 일곱 번의 밤을 넘고 시간을 넘나들 수 있게 된 지금의 아서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물리적으로. 또한, 정서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조건이 그러했다. "빌어먹을." 내가 죽이고 싶지 않았던 수많은 것 중에서 단 하나를 꼽아보라면, 그건 오로지 너였다고. 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렸다. 아서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지자, 루에리가 입을 열었다.

"그걸로 되겠나?"
“…."
"아주 죽일 듯한 눈빛을 하고선."
"……그래, 이렇게는 안 되지."

아서는 표정을 지우려는 듯 잠시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떠올렸다. 눈가의 표정은 풀지 못해 일그러진 상태였지만, 입꼬리를 겨우 끌어올려 웃는다. 그리고 짜내듯 말을 이었다.

"네가 다음엔 더 진심이었으면 좋겠으니까."

이미 충분히 진심이라는 대답이 들리기 전에, 아서의 손이 루에리의 턱을 잡았다. 어딘가 긴장감 어린 시선을 마주친 것은 아주 찰나였다. 어떤 생각이 끼어들 수도 없는 짧은 순간, 아서는 고개를 낮추고 잡은 손에 힘을 줘 들어 올리며 입술을 겹쳐왔다. 명확한 애정의 표현. 하지만 애정이 오가지 않는 관계에서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 더한 폭력이고, 도발일 뿐인.

"……!"

루에리가 강한 힘으로 그를 밀쳐냈다. 이어서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러 몇 차례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라는 듯, 아서는 맞을 때마다 몇 번의 신음을 뱉었을 뿐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맞고도 그 불멸자는 그저 입가에 흐른 피를 대충 닦아내고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서 "이제 좀 화났나 봐." 그랬다. 장난이라도 끝낸 듯이.

"이딴 걸 도발이라고."

루에리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불쾌하다는 듯 제 입가를 몇 번 문질러 닦았다. 침을 뱉기도 하고 그러고서도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입가를 가렸다. 상대를 아무리 험악하게 노려본들, 그 밀레시안은 그저 웃을 뿐이다. 뻔뻔한 낯짝은 이후에도 그저 헛소리만을 늘어놓았다.

"그럼, 애정 표현이라고 할까?"
"이 자리에서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자기야."

그러나 의외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아서 자신에게는 자조에 가까웠다. 진지한 행동도 아니었고, 지나온 시간으로 굳이 돌아와서 그를 희롱하려고 작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작은 변덕. 본인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다만 이것은 이 시간대의 자신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무언가 변할 것이 분명했다. 뭐가 바뀔 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가 분노를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모든 것이 역겨움과 혐오로 그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랐다. 그래서 정말 죽이는 데 성공이라도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몸을 일으키자 근처에 떨어진 검이 눈에 들어와 집어 들었다. 이전에 몇 번 루에리의 검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들어보았는데, 역시나 그 자신이 드는 것은 그보다 더 묵직했다. 그 손잡이를 잡으며 아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꿰뚫리는 상상을 한다. 몇 번이고 멈추고 소생하기를 반복했던 심장이, 그대로 모든 피를 쏟아내어 부활하지 않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검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검의 손잡이를 반만 잡아 손잡이 쪽을 그에게 내밀었다. "자." 마치 대련이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어울리지도 않는 관계임에도.

루에리는 망설이다가 검의 손잡이를 잡는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하지 못한 채, 그는 자기 생각을 했다. 그가 굳이 주워다 내어준 이 검을 잡고 휘둘러, 그를 죽이는 상상.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저 심장이 제 검이라고 순순히 멎어줄까. 검은 검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목적을 잊고 싸움을 하는 동안 날이 져 있었다. 그를 죽이면 모든 목적이 멎을까. 이 여정이 끝날 수 있을까. 이내 생각을 지웠다. 아서가 무기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 * *



비척비척 걷는 꼴이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다. 무기 모양의 풍선이라도 된 양 가뿐하게 들 때는 언제고, 이제는 질질 끌고 와 그 무게에 잔디가 팬 자국이 생긴다. 일곱 번째 밤을 넘어 신에게 도달한, 그 자신이 신이 되어버려 시간까지 뛰어넘은 어떤 존재가 고작 인간 하나와 주먹다짐을 한 끝에 꼴사나운 꼴이 된 것이다. 그의 업적을 반도 알지 못하는 루에리마저 할 말을 잃은 꼴이었다. 그 복잡한 표정의 루에리 앞으로 이내 아서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언제 주웠을지 모를 나무 장작을 근처에 와르르 쏟았다.

마나를 못 쓰는 게 아닌가 싶었던 아까의 전투 때와 달리 아서는 마나를 툭툭 떨궈 손쉽게 불을 피운다. 캠프파이어를 하기에 마땅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아까의 전투에 본능적으로 몸을 피한 몬스터나 짐승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온기가 피어오르자 부은 데가 더 아픈 것 같다고. 아서가 짧게 투덜거렸다.

"너 그 꼴로 이 밤에 더 돌아다닐 건 아니지?"
"딱히 네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래서 불 피웠잖아."

아서는 루에리에게 어디 가지 말고 이리 오라는 듯 눈짓했다. 양쪽 다 멀쩡한 꼴이 아니긴 마찬가지임을 루에리는 새삼 깨닫는다. 어째 무기를 들고 싸울 때보다 더 멀쩡한 곳이 없는 모양새였다. 맞고, 부딪히고, 찢어지거나 쓸린 자국들이 아려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아무 데나 굴러다니던 자신의 짐을 찾아와 근처에 앉았다. 감정의 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같은 불을 나누고서도 두 사람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그 불꽃을 사이에 두고 말없이 시간이 흐른다. 둘 중 누구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고, 할 이야기는 더욱 없었으며, 말을 뱉는다 한들 대화로 이어질 리가 만무했다. 각자의 별에서 와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는 생판 모르는 밀레시안들도 캠프파이어를 피우면 모여 말을 나누기 마련이었는데, 둘 사이에는 그저 인기척과 나무 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혈연보다도 질긴 게 악연이라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악연이라 여기지 않을 때는 그 어두운 감정의 끈조차 질기게 이어질 수가 없다. 이대로 놓아버리면 너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밀레시안과 마주치지 않는 시간대로 돌아가겠지. 우리의 시간은 영원히 부족한 채로 종극에 다다르고 말겠지. 아서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랬듯이.

"좀 도와줄까?"
"필요 없다."

루에리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그 말처럼, 상처 부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붕대를 두르는 손길이 능숙했다. 그 모습이 그가 얼마나 혼자 지내왔는지 짐작게 했다. 그렇게 혼자서 오래도록 트리아나를 찾아 헤매었을까. 트리아나를 찾을 수 없었던, 혹은 그 관을 찾았던 시간 동안 얼마나 큰 분노가 그 안에 들어앉았을까. 숲에 어둠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상념은 검게 탄 속으로 발을 디뎠다. 이번에는 말문이 막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외치던 이를 떠올린다. 그 순간이 그를 외로운 어둠 속으로 얼마나 깊이 밀어 넣었을까. 세 용사 중 유일하게 에린의 땅을 걸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어 얼마나 혼자 걸어 다녔을까. 아서는 한참 동안 그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응급처치를 마친 루에리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게 눈을 마주하면, 그 눈가가 찌푸려졌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어쩐지 한숨 쉬는 것 같은 음성에, 아서는 습관처럼 소리 내 웃었다.

"알고 싶다는 뜻이지?"
"그럴 리가."
"난 네 생각밖에 안 하는데, 자기야."

못되게 드러냈던 애정이 진심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루에리는 안 그래도 펴지지 않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겨우 끌어낸 소강상태에서 다시 검을 들지 않은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 감정이 변색하지 않은 것도.

"너 먹을 것 좀 가진 거 있어?"

문득 아서가 루에리의 가방을 넘겨다보며 말했다. 식자재라면 그보다 자신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을 테지만, 그와는 달리 이 시간대의 그에게 모든 것이 궁금했기에. 그러자 루에리는 의외로 선뜻 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 주었다. 툭, 날아온 육포 조각을 받은 아서는…… 드디어, 정색했다. "너…."

"너 이런 거 먹고 다녀?"
"…?"
"아니…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것만 먹고 사냐?"
"안 먹을 거면 내놔."
"오늘도 이거 먹으려고? 안돼."
"하?"

언제 침울한 생각들에 잠겼냐는 듯이, 언제 조용했냐는 듯이. 아서가 갑자기 돌변이라도 한 것처럼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복수도 몸을 챙겨가면서 하는 거라고, 네 복수의 대상은 잘 먹고 잘사는데 이렇게 지내다간 오늘처럼 머리채 잡히는 수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잔소리 같은 이야기들에서 어딘지 모를 미안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눈치채지 않기를 내심 바랐지만, 듣는 루에리는 말 그대로 어이가 없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를 터였다.

표현 그대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잔소리가 이어지면서, 아서는 요리도구나 식자재를 꺼냈다. 금세 분주해진다. 루에리는 거기에 딴지를 걸 생각조차 못 하고 바라봤다. 미쳤다고 침 뱉고 가면 될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아마 이 제정신 아닌 밀레시안이 놔줄 리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 머리를 짚으면서도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그 끝에 손에 따듯한 그릇이 쥐어진다. 먹음직스러운 향이 나는 고기 스튜였다.

"……."
"자, 봐. 나도 먹을게. 독 안 들었다. 그지?"
"네가 그런 짓까지 하지 않을 건 이미 알고 있거든…"
"그럼 먹어. 복수도 잘 먹어야 하지."

그야말로 복수의 대상에게서 들을 말은 아닌데. 하고 대꾸하는 대신 루에리는 식기를 들었다. 태평하게 짝이 없는 그 밀레시안은 한결같이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놈들도 이런가. 그렇다면 에린이 어딘가 잘못된 길로 가는 중인 것은 아닌가. 하지만 루에리는 순순히 스튜를 떠서 입에 넣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지만, 음식에 독을 넣었을 리도 만무했으므로.

루에리가 식기를 들자 아서는 그제야 제 몫을 챙기고 다시 앉았다. 음식을 하는 동안 약간 줄어든 불길 안으로 장작을 몇 개 던져넣는다. 음식이 들어가고, 장작이 타는 소리가 난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성큼 다가온다. 슬슬 익숙해질 법한 정적이었지만, 긴 잔소리가 지나간 후라서인지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그 어색한 사이로 밀레 시안의 시선이 비집고 들어왔다.

"좀 별로지?"

좀 예상 밖의 말이어서, 루에리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스튜를 한 입 더 떠먹는다. 요리는 나쁘지 않았다. 뛰어나게 맛있지는 않았지만, 빈말로도 맛없다고는 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이렇게 황량한 평원에서 갑자기 먹은 음식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요리한 음식이었다. 만약 별로라고 해도 그렇게 느껴질 수가 없잖은가. 잠시 대답할 말을 고민하고 있자면, 답을 들으려는 질문은 아니었다는 듯이 아서는 말을 이었다.

"옛날에, 나를 만나기 전의 …옛 동료들이 꼭 네가 먹던 육포 같은 걸 먹고 다녔거든. 그걸 알고 내가 합류한 후로는 내가 계속 요리를 해 줬는데."
"..."
"어느 날은 걔내가 나한테 보답하겠다고 너구리를 잡아서 탕을 끓인 거야. 진짜, 그게 얼마나 맛이 없던지."

너구리가 불쌍할 정도였다며, 혼자 말을 늘어놓는 이는 그것이 꽤 좋은 추억이었던 것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문득 루에리는 그가 비로소 웃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곧이어 자연히 자신의 동료들과 불을 피웠던 그 오래전 여행이 떠오른다. 우리 중 누군가가 요리를 했던가. 그 캠프파이어에선 뭘 나누어 먹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던가. 그 생각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동안 아서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제 음식이 식어가는 줄도 모르고 추억에 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너무 좋았어."
"맛이 없었다며."
"그래도 좋았어, 그 애들을 좋아했으니까."
"..."

그래도 좋았다. 다시는 조우할 수 없는 자신의 오랜 기억이 떠올라 루에리는 더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끝을 맞이할 줄 모르고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그저 철없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가 있었다.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희망. 그것이 산산이 부서질 때의 절망감을 떠올린다. 눈앞의 자가 저주스럽게 느껴지던 때로 생각이 이어졌는데, 루에리의 생각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한 아서는 여전히 이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겐 내가 해 준 게 맛없을까 봐."

순간, 그 끔찍한 시간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혹은 지금이 거짓이거나.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애써 속으로 밀어 넣는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쓰인 글자 위에 마구 선을 칠해 덮은 듯 생각을 덮었다. 그저 빈 그릇을 그에게 밀어 넘겨주고는 돌아앉았다.

"먼저 잔다."

아서는 그릇을 받아서 들고 정리했다. 다 비웠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나? 빈 그릇을 보며 다른 상념이 따라붙는 것을 조금 늦게 외면했다.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쉽게 잊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서와 루에리, 둘 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알고 있는 사실. 모든 것을 잃은 마음에 새겨진 것은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변하지 않는다. 덮는다고 덮이는 것이 아니다.

그게 저주든, 사랑이든 간에.

이 시간대로 돌아온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는가. 아서는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오늘도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아서는 자신이 곤경에 처했음을 알았다. 

어떤 방법으로도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막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 이상적인 엔딩을 맞는 것은 그가 언제나 해왔던 익숙한 일이다. 이번 목적은 그를 만나는 것, 조금이라도 시간을 갖는 것…이니 분명 목표는 이루어졌을 텐데. 심지어는 충분한 시간을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날이 밝고, 루에리가 인사도 없이 뒷모습을 보이며 떠난 뒤에도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 지지는 않았다. 분명히 온 생애에 반복해온 아주 익숙한 일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어떻게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나오를 찾아 연유를 물었으나 그 역시 시간의 역행 자체를 모르는 모양이다. 아서는 여러 고민과 노력 끝에 해결방안이 없다는 사실만을 깨닫고는 별로 꺼내지도 않은 짐들을 정리해 일단 길을 나섰다.

더 곤란한 점은, 누군가의 기억이나 의식 속에 들어온 것처럼 밀레시안으로써 누렸던 많은 것들을 빼앗긴 점이었다. 펫을 소환해도 응답하지 않고, 어디서나 원하는 마나 터널로 이동할 수 있는 기이한 힘을 쓸 수도 없다. 잠시 자신의 집을 들르는 것도 할 수 없고. 대륙을 건너는 때에도 그저 맨다리로 걸어 배를 타는 수밖에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무한하게 늘어나는 가방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가이레흐 언덕의 잔디 사이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걷는다. 그 길 위의 밀레시안은 오래전 과거를 떠올린다. 까마득히 옛날. 동료들과 세 용사의 길을 따라 걸었던 길을 떠올렸다. 티르코네일에서 던바튼으로, 던바튼에서 반호르로. 그리고 허상의 낙원으로 떠나던 길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사이에 있으면 지칠 줄을 몰랐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으며, 매일 밤에 피우던 캠프파이어가 그토록 따듯할 수 없었다. 나른한 음악 소리. 앞을 비추는 희망이란 이름의 빛. 모든 것이 잘 짜인 각본처럼 순조로웠다.

그 여행은 꼭 세 용사의 여정을 닮아있었다. 그들이 걸었던 땅을 밟아 나아가는 길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는 파멸의 결과가 두 번 이상 일어나기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막힌 우연 같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우연이 비껴갈 수 있을까. 그걸 위해 돌려보내지 않는 걸까. 혹은, 이것도 허상의 낙원을 좇는 길인가. 아서가 가이레흐 언덕을 지나 반호르로 향하는 동안, 상념은 발목을 붙잡고 광산 아래까지 질질 끌려 따라 들어갔다.





* * *



고요한 광산마을에서도 그 이름이 들리긴 마찬가지였다. 밀레시안이 탈틴과 타라에서 그림자 영웅이라고 불린다는 이야기였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무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수리하는데 애먹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뭐 그런 시시콜콜한 잡담에서 루에리는 또다시 그의 소식을 듣고 만다. 언제, 어디를 가도 듣는 이야기다. 결국, 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금세 잊을만한 사소한 말소리들이 모여 그의 여정을 낱낱이 알게 된다. 언젠가는 화가 나는 것 같았지만, 어느 샌가부터 그것은 곧 익숙해져서 삶의 이벤트도 되지 못했었다. 바로 얼마 전.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모습을 떠올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제 곁을 채우고 들어앉았던 얼굴은 그야말로 영웅의 모습이었다. 영웅을 묘사하는 에린의 모든 말이 그를 위해 있는 말이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 신이 내려다보는 것 같은 담은 것 없는 시선, 전혀 영웅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인데도 무기를 쥐면 빛이 드는 눈동자, 위험 상황이 종료되면 시답잖게 웃어넘기는 모습까지. 루에리는 다시 생각한다. 제 앞에서 쓰러진 트리아나와 리안, 그 앞에서 보이던 그의 당황스러운 낯빛을. 눈을 감는다. 맞춰지지 않는 퍼즐이 흐트러졌다. 그 흩어진 틈 사이로 가벼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고,

"뭐야, 왜 이런 데서 혼자 궁상떨고 있어?"
"...?"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허무는 손이 루에리의 팔을 붙들었다. 그 단단한 팔은 반사적으로 뿌리치려는 몸부림에도 쉽게 뿌리쳐지지 않았다. 허탈할 만큼 가볍게 들어 올려져 손 주인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밀레시안은 뻔뻔한 낯짝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민다.

"밥 먹으러 가자, 나 열아홉 살 몸이라서 혼자 주점 못 들어가."
"뭐?"
"그리고 여기 이비 자리니까 무서운 얼굴로 그렇게 있으면 안 돼. 네 인상 좀 봐라, 나도 무서워 죽겠는데 애는 어떻겠어?"

그 말과 행동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놀랍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분명 어제도 이런 모습을 보았던 것 같은데,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세상에 영웅이라고 불리는 사람. 그런 이름이 무색하게도 아무것도 아닌 주민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섞이는 사람. 원래 알던 사람처럼, 늘 보았던 사람처럼……. 마을 주민들이 서술하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 듯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대가 다름이 아닌 루에리, 자신인데도. 그를 보는 시선이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있는데도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 이것은 기만인가, 그저 성격일 뿐인가. 상념 새로 불편한 말이 새어나갔다. 상대는 그렇게 받지 않았지만.

"…네놈과 마주 보고 밥을 먹으라고."
"어제도 먹었는데 뭘."
"어제는…."

루에리의 로브 자락에 들러붙은 붉은 흙들을 아서가 습관처럼 손끝으로 톡톡, 쳐 내자 루에리가 그 손을 날카롭게 쳐냈다. 잠시 말이 끊긴다.

"아, 미안."
"미안해할 줄은 아나 보군."
"여기서 더는 못하지. 가자."

그는 가볍게 눈짓한 후 주점으로 향하고, 루에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지금 시간에 마을 밖으로 나가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어차피 배가 떠나기 전까지는 여기 머물러야 하니 선택지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 *




루에리는 조금 체념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진작 뿌리쳤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도 못 한 채 거의 휘말리다시피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때는 이미 한참은 늦은 후였다. 둘은 결국, 주점에 들어와 마주 앉는다. 루에리는 그를 바라봤다.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고, 짧게 후회하고 만다.

그를 앞에 두면 감정이 늘 통제를 벗어나 넘실거렸다. 조금만 기울여도 완전히 쏟아져나올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 쏟아진다면 그것은 잉크처럼 여기저기 스며들어 영영 지워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때문에, 루에리는 생각을 접고 식기를 집었다. 그 면상을 보고 영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던 식사는 의외로 편안하게 넘어가며 술안주에 가까운 요리들의 맛을 느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케 여기까지 왔네."
“못 올 이유가 있나?"
"아니, 그냥 안부차 하는 말이지."
"안부를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그건 그렇구나." 납득하는 말 끝에 미묘한 침묵이 흐른다.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서는 잠시 턱을 괸 채 루에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의 얼굴을 보며 늘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저런 얼굴을 했다. 비록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진중한, 무겁지만 무섭지는 않은. 어떤 따듯함을 숨길 수 없는 얼굴 말이다. 딱 그가 걸어온 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르게 걸어왔다면, 조금만 더 밝았다면. 그는 자신보다 더 영웅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터다.

순간 그에게 손을 뻗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들어서, 아서는 근처의 병을 집어 들었다.

"안부 나누기 어색하면, 맥주라도 한잔하든가."

그 말에 시선이 밀레시안에게 와닿는 것도 잠시, 루에리가 그 맥주병을 낚아챘다. 너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대처하지도 못한 아서가 자신의 빈손과, 루에리의 손을 본다. "미성년이 내 앞에서 술 마시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서."라는 말까지, 이렇게 자연스러울 일인가…….

"허…. 내가 미성년이겠냐?"
"19살 몸이라 주점에 혼자 못 들어온다고 한 건 누구고."
"아아아, 말이라도 못 하면."
"불만 있나?"

됐다, 됐어. 아서가 고개를 내젓고 다시 식기를 들었을 때 루에리가 맥주를 따고 잔을 채우는 모습이 보였다. 이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밀레시안에게 이 모든 것은 너무도 낯선 일이었다. 그의 모든 생이 끝나기까지 그저 대적자로서 칼을 맞대기만 했던 자였기에 그랬다. 살아가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평범한 사람처럼 맥주 한 잔을 따르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그 때문에 아서는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잔을 채 채우지 못하고 병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루에리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

그 의아한 눈빛에서 질문이 떨어지기 전에, 아서가 손을 뻗어 그 잔을 빼앗아왔다. 마찰음을 내며 잔이 테이블을 미끄러져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꾸깃하게 접히는 미간, 불만스러운 시선.

"너도 먹지 마."
"왜지?"
"안 그래도 고민 많은 성인 남성이 혼자 술 마시면 처량하게 보이니까."
"허."

맥주라도 한잔 기울이는 모습이 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 이 농담과 어색한 식사 자리를 최대한으로 늘리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그 긴 시간 중 어떤 시간이 소강상태인 둘 사이에 다시 불을 붙일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지 않은가. 변명 같은 말을 머리에 새긴다. 그것이 관계를 비트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공포인지를 무시하고서.

"먼저 일어난다."

아서가 빈 식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을 했지만, 이내 말하지 않을 것이라 결정했는지 이내 자리를 떴다. 시선을 그렇게 못 떼고 있던 것과 다르게,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이번에는 루에리가 응시했다.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식사시간이 지났다. 절대 아무렇지도 않지 않았던 식사시간이 지났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식사를 하는 것도, 캠프파이어에서 몸을 녹이고, 잠을 자고, 손이 닿으면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루에리가 알고 있는 밀레시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무언가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전에는 몰랐던 것, 아서가 더이상 소문과 추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 * *




반호르에 포워르가 침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호르는 광산의 광부들이나 유명한 대장장이, 마을에서 자라며 전투에 익숙해진 주민들이 있었다. 바리던전을 통해 포워르가 주기적으로 올라온다고 해도 그것을 대처할만한 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시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한곳으로 쏠렸다. 루에리는 그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으니,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어린 시선. 그 시선이 부담스러울 법도 했다. 남이 할 수 있는 일을 떠맡는 것을 필요 없는 일이라 여길 만도 했다. 그러나 그 밀레시안은 한숨조차 쉬지 않고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낸다. 그런 부담마저 마땅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인 양.

"들어가 있어, 내가 할 테니까."

그 가벼운 말을 대피명령으로 받아들였는지 이내 모든 사람이 자리를 피했다. 당연하게 무기를 가지고 나오는 것은 아서와 루에리 뿐이었다. 포워르들이 괴성을 지르고, 어떤 것은 두 사람에게, 어떤 것은 마을을 향해 흩어지거나 뭉쳐졌다. 수가 제법 많다. 하지만, 이것을 시련으로 칠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저 두 사람 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빛의, 어둠의 기사의 길을 걸어온 둘에게 바리던전쯤 되는 던전을 정복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으니, 그들 중 일부가 올라와 벌인 전투에서 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저 무기를 몇 번 휘두른 것으로 한 무리가 쓰러져 죽거나 다쳤다. 누군가의 피가 뿌려지자, 힘의 차이를 실감한 포워르들 중 몇몇은 자기들끼리 무언가 소리치며 이야기한 후 광산으로 다시 뛰어간다. 그러자 루에리가 그들을 잡기 위해 도약했다. 다만 그 공격을 받아낸 것은 등을 보인 포워르가 아니라 밀레시안이었다. 강한 충돌음이 들리고, 그 어마어마한 충격에 두 사람이 조금 밀려났다.

"무슨 짓이냐."
"다 죽일 필요는 없잖아. 살고 싶어서 도망가는데."
"죽이지 않으면 그들은 복수를 위해 다시 오게 될 거다."

기묘한 시선이 맞붙는다. 죽고 죽이는 문제, 선과 악을 가르는 문제, 혹은 약간의 미래를 가늠하는 문제들. 어떤 것이 옳다 할 수 없는 문제들이 도마 위에 올려졌다. 적극적으로 서로를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할 문제였지만, 아서는 그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나는 못 하겠는데." 하는 짧은 말만을 뱉는다.

논리라고는 없는 말. 하지만 그것은 명확한 신념을 담았다. 약자임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자의 뒤에 칼을 꽂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포워르라도. 심지어 소통이 불가능한 자라도.

그런 그가 트리아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떠올린 루에리는 인상을 구겼다. 이만한 위선이, 이만한 기만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이 위선이 아니게 되려면 트리아나에게도 그렇게 해야 했다. 포워르였어도 그 아이는 나약했으니까, 그 아이야말로 살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어떻지. 루에리가 검 자루를 강하게 쥐었다.

"그건 너의 위선일 뿐이다, 밀레시안. 네 행보가 늘 그랬던 것처럼, 네 이면에서 또 누군가는 피해를 볼 테지. 돌아선 포워르의 복수심은 결국 네가 아니라 이 주민들을 향하게 될 거다, 비켜."

그 말을 끝으로 루에리가 검을 휘둘렀고, 밀레시안은 명확한 의사를 표현하듯 그 공격을 다시 막아냈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의 무기가 맞부딪히며 주변에 파문이 일었다. 틀린 말 하나 없는 것이었다. 아서는 언제까지나 반호르에 머무를 수 없고,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는 없다. 잘못된 선택이 사람을 죽이고, 이기적으로 베푼 위선이 피해로 돌아오는 일도 겪어보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모든 시련을 자신이 막아낸 위선으로 에린의 주민들이 나약해진 것만 봐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가. 아서가 손에 힘을 줘 루에리의 검을 쳐 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그럴 수 없는 이유라는 것이 아서, 혹은 둘에게 있었으니까.

"나, 포워르인 친구가 있어."

아서가 먼저 입을 열었고, 말을 잇는다. 그 순간 관계가 다시 비틀릴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네게도 그 아이가 있었잖아."

쨍강,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루에리의 표정이 사납게 굳어지고, 이내 밀레시안에게 달려들었다.

"닥쳐, 아서."

루에리가 아서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증오와 복수심이 어린 익숙한 눈빛과, 속을 알 수 없는 색의 흐릿한 눈동자가 마주했다. 언젠가는 거기에 죄책감이라도 느꼈던 것 같다. 그 죄책감에 갉아 먹히고, 가라앉고, 또 잠식되어서 아무 말도 못 했을 때가 있었다.

"네가 트리아나를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 텐데…!"

그런 때도 있었다. 그랬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을 느끼기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그런가. 나는 모르겠는데."
"뭐…?"

너무도 많이 꼬였다. 아득히 먼 거리를 돌아왔다. 오랜 시간 전부터 시작된 오해는 두 사람의 머리, 상상에서, 왜곡된 기억 속에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변해왔을 것이다.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런 것을 풀어낼 수 있을까. 정말로 잘못이 아니라 오해라고 한들, 그것을 인제 와서 증명하거나 되돌릴 수 있을까. 밀레시안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다. 그를 만나고, 그를 잃고, 다시 그를 찾아오는 시간 동안.

"방금 네 말들을 생각해 봐.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 애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닥쳐!"

그렇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루에리는 결국 손을 뿌리친다. 아서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분노나 증오보다는 상처받은 얼굴에 가까웠다. 절망에 가까웠다. 애당초, 네가 사람을 그렇게나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긴 한가. 결국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게 아닌가. 아서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어."
"너는 그렇게 했다. 죄를 회피하려고 하지 마!"

목소리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같은 수많은 후회. 다른 것을 내팽개치고 너를 쫓을 수는 없었나, 그 자리에서 자신이 아니라는 말 대신 잘못을 빌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맞아, 나는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 모든 후회가 더는 의미가 없음을 안다. 모든 일은 이미 벌어졌으며, 후회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아갈 길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는 것임을. 뒤에 있는 것은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 잘못이 있었으니까, 그런 희생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이렇게 변했어."

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을 거고, 그렇게 하게 두지 않을 거야. 루에리. 그 밀레시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
"더는, 그때와 같은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아."

아서는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턱 끝에 걸려있음을 깨닫는다. 그 얼굴을 보면 누구나 사과하고 싶어질 것이다. 루에리, 에린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 그를 벼랑 끝으로 몬 것도, 그를 구해내지 못한 것도 아서였지만, 그 어떤 것도 아서가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 한마디만큼은 뱉을 수가 없다. 그걸 뱉는 순간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 밀레시안의 사죄가 되어 갈 곳 없는 분노만 루에리 혼자 떠안게 될 것을 아서는 알았다.

너에게 증오를 받아도 좋다. 그 복수심이 끝내 자신을 죽이게 되더라도, 그것을 놓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그 마음과 동시에 모순되는 감정이 든다. 너를 갉아먹는 감정에서 해방되면 좋겠다는.

루에리의 시선이 떨어진 것을 깨닫는다. 그 붉은 머리 아래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것으로 네 잘못이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아서."

모순 중 한 방향이 깨어져 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 * *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다 그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트리아나를 잃었던, 리안을 잃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아서의 칼에 두 사람이 쓰러진다. 그것이 루에리가 아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그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고, 자신이 그를 저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흔들리는 일이 일어났다.

눈을 깜빡이면 모습이 변했다.  아서가 아닌 다른 이의 칼에 맞고 쓰러지는 트리아나. 이미 살 수 없었던 상태의 리안. 모든 것이 오해라는 가정. 다시 한번 깜빡이면, 다시 모든 일이 있었던 일이 된다. 그 어떤 일도 그 밀레시안의 의지는 아닌 채로.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혼돈이었다. 한 번도 생각하거나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 사실인 양 머릿속에서 그려졌다가, 흩어지고, 잘리고, 다시 붙여지기를 반복했다. 수많은 사실이 생겼다 사라진다. 되려 모든 것이 거짓만 같았다. 이 과정에서 확신할 수 있는 점은 단 하나, 더는 그 무엇도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설사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맞아, 나는 그렇게 했지.' 아서는은 루에리가 아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변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괴물의 모습을 한 포워르여도 이유가 없으면 사살하지 않는다고. 그 말은 일어난 일을 바꾸는 말이 아니었지만, 그 말로써 일어난 일을 보는 관점이 뒤흔들렸다. 오래전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이상 생각하고, 고민하고, 되씹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루에리는 혼돈에 잠겨 있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모든 시간이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흔들렸고, 넘실거리던 감정이 쏟아져 사방에 흘러넘쳤다. 이미 모든 것이 검은 잉크처럼 스며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포워르는 복수를 명분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말이다.



"나, 먼저 갈게."

그 후, 아서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떠날 채비를 다 하고 대뜸. 그냥 떠났으면 될 것을 굳이 루에리의 앞까지 걸어와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리고 루에리가 답을 하기 전에 돌아섰다. 해변 방향으로 몇 걸음. 이내 다시 돌아서서 몇 걸음 돌아온다. 전투 이후 대화를 나누던 때처럼, 진지한 투로 입을 연다. 이전처럼 가벼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나, 미안하다는 말 정말 하기 싫은데." 그 역시 혼돈 속에서 지내기라도 한 것처럼.

"한가지는 미안해."

그리고 흩어지는 시선. 망설이는 숨, 떨리는 입술. 중대한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목소리가.

"좀, 잘 지내보고 싶었어.“

감정에 실려 떠내려온다.

”……내가, 변하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미안해. 말을 맺는다. 잘 살라던가, 밥은 먹고 다니라든가, 덧붙일 인사말을 생각해 놓았던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뱉을 수 없었고, 그렇게 밀레시안은 돌아섰다. 루에리의 마지막 표정도 보지 못한 채로. 이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망가뜨렸는지, 조금 괜찮은 방향으로 틀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이제 돌아가면 된다. 돌아가면 또 잊을 것이다. 어차피 이번의 시간여행도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광산마을에서 해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간은 그랬다.



얼마 가지 않아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얗고 노랗게 변했던 발아래의 흙이 다시 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한걸음 뗄 때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굵어지고, 비처럼 상념이 쏟아졌다. 홍수에 잠겨버릴 것 같았다. 어딘가로 끝없이 추락해버릴 것만 같다. 비참함이 발목을 끌어당겼다. 저 심연 아래까지, 나락 끝까지 끌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 두려움 속에서, 빠르게 걷던 아서의 걸음이 멈췄다. 발아래의 심연보다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시간은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었다. 동시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선택지가 주어지더라도, 영원히.

발을 돌렸다. 목적지가 확실하니 걸음이 빨라졌다. 풀이 자란 땅을 박차고, 붉은 흙이 깔린 마을로 돌아간다. 누군가가 돌아온 자신에게 무어라 묻는 말을 던졌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빠르게 계단을 오른다. 차게 식은 다급한 숨, 목적지를 훑는 시선과 가쁜 발걸음. 똑똑 노크 소리, 다음의 침묵. 이내 문이 열렸다.

"밀레시……"
"나, 하룻밤만 재워주라."
"뭐?“

당황한 눈빛이 시야에 담긴다. 고개를 숙였던 그때의 모습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주점에서 보았던 얼굴만이 시야에 담겼다.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진중한, 무겁지만 무섭지는 않은. 어떤 따듯함을 숨길 수 없는 얼굴. 말이 이어졌다.

"비가 오는데 방이 없네. 사실 그렇다고 거짓말하는 중이야. 그냥, 그냥."
"……."
"이러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하룻밤만 줘."

아서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내려다본 시야에는 루에리가 들어왔으므로, 그 머리카락에, 로브 자락에 맺힌 물이 루에리의 얼굴로 떨어져 내렸다. 루에리는 붉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그걸로 뭔가 변하게 되지는 않는다, 아서."
"그거야 모르는 거잖아.“

그 목소리는 간절하기 짝이 없다.

"너도 궁금하잖아. 속에 들어와 있는 이게 다 뭔지, 어떤 형태인지."

하지만 루에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속에 들어앉아 감정을 엉망으로 어지르는 것. 기억과 생각을 뒤엎는 것, 쓸데없는 욕심과 죄책감을 끌고 오는 것. 벽 하나를 허물고 나니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 해묵고, 때 묻은 감정.

"알게 되면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 너도, 나도."

그것이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루에리가 한 걸음 멀어졌고.

"빌어먹을 후회.“

아서는 한 걸음 다가섰다.

"하라고 해, 어차피 너랑 엮인 모든 건 후회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 *



그 옷자락을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루에리는 또다시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낯선 감촉에 입술이 어쩔 줄 모르고 헤맸고, 아서는 손으로 턱을 벌려 입술을 겹쳤다. 비에 젖은 차가운 체온이 방 안의 따스한 체온과 기분 좋게 섞여들었다. 그 입맞춤처럼 뒤엉킨 발걸음 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섰고, 그야말로 애정이라고밖에 표현될 수 없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루에리는 문득, 그 입맞춤이 며칠 전, 처음으로 입술을 맞대었던 때 느껴지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그래, 오래도록 그는 이런 태도였다.






* * *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음성이 새어 나온다. 약간의 흥분이 섞인 음성에 미미한 짜증이 깃들어 있는 것마저 아서는 꽤 마음에 들었다. 루에리의 손이 아서의 팔 위로 올라왔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섞인 손길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제라도 하지 말까? 묻고 싶은 말을 삼킨다. 아서의 두려움은 반대쪽이었으니까. 싫다고, 없는 것으로 하자 할까 두려웠다. 모든 것이 없는 일로 돌아가 버릴까 두려웠다. 그런 불안함을 증명하듯이, 두려움에 저항하듯이, 아서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이내 저항감이 있는 몸을 당겨 제 것을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단단하게 선 기둥이 안쪽 깊숙이 예민한 곳을 찌르자 목을 긁는 신음 소리가 난다. 앓는듯한 신음성. 저러면 목 다 잠길 텐데. 아서는 목을 울려 웃고, 달래듯 그 입가에 입 맞췄다.

"미안, 아팠어?"
"이 뻔뻔한 자식이…."

처음이라니까, 천천히 해야지. 그래서 조금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바르작대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를 품에 안은 자에게는 과한 자극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어쩔 줄을 모르는 허리가 들썩일 때마다 자신의 것을 꾹 쥐는듯한 감각이 저릿하게 느껴진다. 아래에 피가 쏠리는 것 같은 흥분감은 더 차오르기만 했다. 그저 기다릴 뿐인데도 흐트러진 숨소리를, 억눌린 신음을 흘린다. 루에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밀레시안의 팔을 밀었다. 하지만 어쩐지, 어느 시점부터는 계속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떤 망설임이 남은 것인지, 혹은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온 이가 밀리지 않으려 더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는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 없다. 둘의 변덕으로 시작된 밤일 뿐이었으니 원한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자기 자신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루에리는 묘한 패배감을 느낀다. 비단 상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서의 넓은 손이 루에리의 붉은 머리 아래 드러난 목을 감싼다. 고개를 숙여 섞이는 뜨거운 숨 속에서 속삭였다. "입 좀 벌려주라."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진실된 감정이 담길 때만 그렇게 변하곤 했던 웃음기 없는 목소리가. 루에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입맞춤을 받았다.

"흡…!"

그 입맞춤이 눈속임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안에 들어찬 것이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제자리를 찾듯 밀고 들어온다. 내벽이 함께 쓸려나가는 것 같은 불편감이, 안을 채우고 누르는 압박감이 곧이곧대로 느껴져 입술 새로 숨이 새어나갔다. 하지만 그 집요한 움직임은 양보할 줄을 몰랐고, 달래는듯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얼굴을 맞대고 있음에도 높아지는 숨을 참을 수가 없어서 루에리는 결국 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좀 떨어져…숨 막혀." 그러자 아서의 손길이 붙잡고 있던 목덜미에서 떠나 허리를 쥔다. 이어지는 허리짓에 그가 쉬이 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좀 괜찮아?“
”……이상해.“
"어쩌지… 난 너무 좋은데.“

붉은 눈빛이 날카롭게 물든다. 한결같이 날이 선, 낯익은 얼굴이 된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사람을 밀어낼 수도 없는, 태생이 무른 사람. 그를 바라보는 흐릿한 빛의 시선이 애정을 담아 선명하게 흔들리는 붉은 눈과 마주했다.

더는 못 참겠다고. 아서가 속삭였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처럼 맞닿은 몸이 긴장한다. 단단한 근육이 딱딱하게 굳고,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미적지근하던 체온이 어느새 흥분감으로 달아올라 있는 것이 느껴졌다. 꼭 기대감에 가득 찬 모습이네. 즐거운 숨에 웃음기가 걸린다. 그런 그를 달래듯 페니스를 쥐고 쓸어주며 귓가에,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애무했다. 그리고 이내 경험이 없는 자를 배려해 굳이 참아왔던 인내심을 풀었다. 단단하게 선 성기를 빠지지 않을 정도로 뺐다가 깊은 곳까지 쳐올리자,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흥분된 신음성이 섞여들었다. 어떤 때는 느리게, 어떤 때는 다급하게.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불규칙적인 움직임에 루에리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 어깨에 매달렸다.

아서는 품에 안긴 이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허리를 꽉 끌어안고 안쪽을 파고들었다. 팔을 끌어 잡고 자세를 바꾸고 싶은 충동이 든다. 손자국이 남도록 붙잡고 몇 번이고 거칠게 밀어 넣어 울려버리고, 또 달래고 싶은 마음을 조금 참아냈다. 붉은 눈에 물기가 어리는 것을 보면서, 얼굴을 마주 본 그대로 허리짓을 이어갔다.

"윽, 아…!"

조금 높은 신음이 터진다. 목에서 쏟아지는 소리가 가둬지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그 붉고 선명한 시선은 흥분에 녹듯 풀려 있었지만, 그 위로 당황스러운 빛이 어린다.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모습을, 그만하라는 듯 밀어내는 손길을 느끼면서도 아서는 멈출 줄을 몰랐다. 잠시 멈추는가 싶었을 때는 입가를 가린 그 손을 당겨 깍지꼈다. 흥분으로 전신에 달뜬 흥분감이 가득했지만, 닿은 손이 유독 델 듯 뜨겁다. 아서는 다시금 거칠게 밀어붙였다. "루에리, 나, 봐. 피하지…말고." 흥분감 어린 눈동자에 애정이 쓰여있는 것을 알면, 루에리는 꼭 그 품안에 갇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뜻대로 빠져나갈 수도,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것을 뜻대로 멈출 수도 없는. 동시에 그 행위들에서 색정을 느끼는 자신을 깨닫는다. "하윽, 싫, 싫어…아, 흣…!" 애원하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흥분에 절여진 것 같은 소리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흘러나왔다. 몸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치욕스럽게 느껴지고, 그것이 흥분으로 전이되는 것에 수치를 느꼈다.

"루에리."

귓가에 낮게 울리는 소리에도 등줄기를 타고 저릿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상대가 그인 걸 알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라서 그랬을 것이다. 늘 제가 원하는 만큼 거리를 유지해주던 상대가, 고삐 풀린 짐승처럼 신음을 흘리며 저를 붙잡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도, 언제나 제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던 입술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것처럼 몇 번을 입 맞춰오는 것도, 이 혼란스러운 정신 속에서 그렇게 명확하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가 하반신을 쳐올릴 때마다 갈증이 났다. 속삭일 때마다 애가 타고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수치스러움이, 속에서 일렁이는 여러 감정이, 온갖 불안정한 마음들이 모두 욕정으로 흐르고, 급기야는 그를 원하는 것 같은 감정이 일었다. "아서…제발, 좀." 애원이라도 하는 소리에 그 이름이 섞이면, 아서는 이제 못 참겠다는 듯 루에리의 목덜미를 깨물며 안쪽에 파정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느라 입이 메말랐다. 그 입술에 아서는 익숙한 것처럼 입을 맞춰온다. 고작 하룻밤 몸을 섞었다고 그것이 익숙해질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아서가 여전히 그에게 조심스럽게 굴었기 때문에 루에리는 가만 제 입술을 벌려주었다. 혀가 섞이고, 체액이 섞였다. 서로의 숨을 삼키면서,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존재를 체감했다. 추상적인 복수의 대상,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람. 다시는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상대. 입술이 떨어져도 다시 당기고, 다시 눌러 집요하게 따라붙어 입안을 침범하고, 낯선 혀를 섞었다. 아쉬워 죽겠다는 듯이.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좀, 놔."

그런 그를 다시 밀어낸 것은 루에리였다. 더하면 물어버리겠다고 위협의 말도 따라붙는다. "그거 너무 야한 거 아냐?" 어느 정도 이전처럼 돌아온 가벼운 목소리로 답하는 아서는 그의 입가에, 턱에. 잠긴 소리를 내는 목젖에 차례로 입 맞추며 자연스레 후희를 이어갔다. 낯선 흥분이 그렇게 가득히 들어차 있었으니 아직 여운이 남아 다 떨쳐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길고 굵은 손가락이 몸을 훑을 때마다 잘 잡힌 근육들이 잘게 떨었다. 언제 쏟아졌는지 모를 정액을 머금은 근육들 사이의 굴곡 위에 손가락이, 그 것을 따라 내려가는 이의 입술과 혀가 닿고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이내 제지하는 손이 어깨를 잡았다. 두려움과 망설임, 흥분감이 섞인 손길이었다. 동시에 전보다 더 힘이 들어간 손길이었지만, 그 불멸자는 순순히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번엔 진짜로 버티네." 루에리가 짜증스럽게 툭툭, 힘을 주어 밀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서는 떨어질 줄 몰랐다. 대신 비슷한 힘으로 버텼다. 진득하게 핥아 내리던 입술은 하체로 내려가 멈추거나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오히려 사정 후 늘어져 있는 상대의 것을 손으로 쥐고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그를 밀어내는 것에 실패하고 애무를 받던 루에리가 펄쩍 뛰기라도 할 것처럼 놀라는 것이 아서의 손과, 입에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진짜 발정이라도 난 거냐." 그 머리채를 잡아 밀어내자, 선단 끝에서 겨우 입을 떼고 음란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 마주쳐온다. "아마도?" 그의 긴 손가락이 루에리의 한쪽 다리를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한 번만 더 하자."
"미쳤어…"
"음. 아마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보통은 나를 죽일 남자랑 자진 않지. 대화라고 할 수 없는 말들이 오가는 동안에도 아서가 손을 쉬지 않아서, 루에리는 다시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이제 둔부를 단단히 받치고 어느새 다시 고개를 쳐든 중심부를 입에 머금었다. 그렇게 서슴없는 몸짓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는 생소한 느낌이 앞섰다. 따듯하게 젖어있는 말캉한 입술이, 혀가 닿고, 자신의 것이 삽입이라도 하듯 상대의 입 안쪽 깊숙이 들어간 감각이.

다시금 저릿한 것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만……. 더는 처음이 아니게 되어버리자, 자연히 이후에 일어날 일을 예상한 몸은 금방 달아오른다.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흥분에 들뜬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머리통을 밀어낼 작정으로 머리채를 잡은 거였지만, 그 손이 아무 역할을 못 하는 동안 추삽질을 하듯 그가 움직임을 이어갔다. 빨아내듯이 당겼다가 다시 끝까지 삼키고, 다시 빠져나온다. 문득 시선이 들렸다. 진짜 그만하고 싶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 루에리는 어떤 충동에 이기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응답하듯 성기가 목구멍에 닿을 듯이 밀려들어갔고,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의 사정감이 느껴졌다.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성욕이 들끓어 사고가 마비된다. 그의 심성대로라면 충동에 못 이겨 머리를 잡고 추삽질을 이어가도 그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루에리가 다 밀어내지 못한 고민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아서가 제 머리칼을 잡은 손을 잡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잘 참네. 입에다 하기 미안했어?“
"…어떻게 하겠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데. 지금은 좀 늦었지만."

방금까지 물고 있었던 것 때문인지, 그 역시 비슷한 흥분을 느끼는지. 애타는 목소리가 어쩐지 더 질척하게 들려온다. 그는 루에리의 허리를 끌어당겨 상체를 다시 눕게 했다. 여전히 다리가 올라가 있어서 조금 비틀어진 자세가 되었지만, 그런 것에 치욕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미쳤냐고 매도하는 대신 뭐든 빨리하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리가 들어 올려지니 기묘한 안도의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상대가 충분히 일어선 자신의 것을 뒤로 밀고 들어왔다. 시야가 아찔해지며 상념이 흐트러졌다. 속에서 무언가 녹아내린 것 같았다.

"아, 윽…."
"하, 좋다… 아까보단 훨씬 낫네."

그렇지? 아서는 저항감이 훨씬 줄어든 루에리의 안쪽에 들어서며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말했다. 몸과 함께 딸려 올라온 그의 다리에 입 맞추고. 발목을 깨물어 자국을 남겼다. 순간 그것이 오래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을 깨닫는다.

아서는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상념을 밀어내려 깊게 파고들고, 긴장한 그의 몸이 자신을 죄어오는 걸 잠시 느끼고 다시 쳐올리기를 반복했다. 아서 역시 턱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놓을 수가 없고, 멈출 수가 없다. 언젠가의 입맞춤처럼, 그 형태를 알 수 없는 질긴 인연처럼.

"윽, 아…! 천천히, 좀,"
"하… 루에리, 너무 좋아."
"이 망할, 자식이……."

루에리의 신음소리가 어느 샌가부터 가로막히지 못하고 쏟아지는 것을 아서는 깨닫는다.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에게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때문인지, 그의 안에 자리 잡았다는 만족감 때문인지, 혹은 그저 달뜬 열기들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그 천천히 허리짓을 멈추고는, 루에리의 팔을 끌어당겨 일으켰다.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제 위에 올라오는 무게감도, 더 가까이 닿는 체온도. 이렇게 기꺼울 수가 없다. 흥분감에 풀어진 건지, 이 상황들에서 몇 가지를 포기해 버렸는지. 루에리는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바라보면서도 순순히 끌려왔다. 품에 안은 모양새가 되자 아서가 그 허리를 받치고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 맞췄다.

"아팠어?"
"……그게 멎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하하… 미안. 달래면서 하는 건 잘 못해서."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였지만. 아서는 쓸데없는 말을 뱉지는 않았다.

"다리에 힘을 좀 풀어봐. 내가 해 줄 테니까."

아서가 루에리의 둔부를 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스스로 움직여보라느니, 같이 움직여 달라느니. 상대가 다른 이라면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체위였지만  아서는 다시 참아낸다. 그런 요구를 들어줄 리도 없었고, 그가 이미 한 발……아니, 몇 발 양보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여정에 발걸음을 붙일 때도, 몇 마디 말을 건네고 답을 받을 때도, 함께 식사를 할 때도, 기어이 이 침대로 끌어당겼을 때도 그는 아서의의 뻔뻔스러운 요구에 어쩌다가 말려들어 뜻하지 않게 몇 발씩 양보한 것이 아니었는가. 최소한 아서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윽…."

비교적 가벼운 요구에 따라 그가 다리에 힘을 풀어 아서의 손에는 무게가 실렸다. 아서는 붙잡은 팔에서 천천히 힘을 풀어 그의 체중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끝까지 삼키게 했다. 겨우 힘을 푼 다리가 떨리는 것을,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가 손톱에 패인 자국이 생기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의 몸을 들었다가 내리며 허리에 힘을 줘 쳐올렸다. 누워있을 때보다 깊게 들어오는 감각에 루에리는 어느샌가 통증보다 더 큰 흥분이 차오르는 것을 깨닫는다. 목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들에 상대를 원하는 듯한, 애타는 감정들이 깃들어 아무렇게나 뭉개진다. 결코 얇지 않은 몸이 자극적인 감각들에 녹아내리듯 중심을 잃어 상대에게 몸을 기댔다. 그리곤 그저 제 몸을 붙잡고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서 위아래로 흔들렸다. 질척이는 소리가,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아픈 신음과 섞인 흥분된 음성이, 달아오른 뜨거운 숨소리가 섞이며 다른 것들을 잊은 두 사람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픈 적 없던 부위들이 통증을 호소했다. 격렬한 전투 후보다 지친 몸이 엉망이 된 침대 위로 늘어졌다. 몸을 섞은 지 시간이 조금 지나 이제는 숨이 다 가라앉은 루에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서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러면 아서는 선명한 빛을 찾은 붉은 눈빛을 본다. 깊은 곳을 칼에 베인 듯 새겨진 감정은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오래전에 떠올렸던 생각이 머리를 떠다닌다.

"키스해도 돼?"

뻔뻔스러운 낯이 물었다. 여전한 목소리였다. 미쳤냐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싫다고 말하고만 싶었다. 후회할 거라고, 너와 내가 느낀 것은 전부 착각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서가 이내 입을 맞춰왔고, 루에리는 턱을 들어 입맞춤을 받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모르겠다, 아서.”

그 별거 아닌 울렁거림이, 쏟아진 감정들이 이런 식으로 정리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루에리가 덧붙였다. 아마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너를 용인하면서도, 동시에 증오하는 걸 멈추지 못할 거라고. 그 이야기들을 아서는 담담하게 듣는다. 그 끝에 답을 했다. “근데, 나도 그래.” 제 표정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가 없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러니까 싫으면 전처럼 때려도 돼. 욕하고, 증오하고, 깨물고, 심지어는, 아직 죽이고 싶다 해도 상관없어.”

아서는 잠시 루에리의 손을 내려다봤다. 거칠고 상처 많은 손이었다. 몸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몸에서는 세월감이 느껴진다.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꾸준히 자랐겠지. 그동안 검을 쥐고 놓을 줄 몰라 이렇게 거칠고 단단해졌겠지. 처음엔 꿈으로, 다음엔 희망으로, 어느 순간 절망과 증오로. 그 모든 것이 쌓여 이리 상처 많고 거친 몸이 되었겠지. 감상에 젖은 불멸자는 그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춘다.

“그 감정이, 그 시간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없다는걸 알아. 그래도 괜찮아.”
“그 말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지."

그러면 아서는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지는 말에는 루에리도 함께 웃은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후회.”

 
 
 

 

[밀레베인] 마지막 숨

마비노기 2차/밀레베인2022. 12. 24. 00:56

*G25의 스포일러를 포함하며, 베인에 관련한 개인적 해석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트리거 워닝 : 신체 절단, 유혈, 살해, 보는 관점에 따라 네크로필리아적 요소가 있을지도….

 

 

 

 

 

 

비로소 찾아온 끝. 멈추어진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의 끝에 당연하다는 듯 걸어오는 밀레시안을 보며 여러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다. 그 생각 끝에 낸 결론이란, 몇번이고 반복된 시간이 드디어 원하던 모습으로 형체를 갖추었다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완벽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베임네크가 손에 쥔 검에 화염이 타올랐다. 

 

몇번이고 좀 더 편안 자리에서 마주쳤고, 불편한 자리에서도 이어가는 싸움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둘 사이의 공기 에는 전에 없던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흐릿한 회색빛 눈동자들이 마주했다. 흔들리던 감정이 조용히 침잠한다. 다시 떠올린 눈빛에는 얼핏 살기로 읽을 수 있는 감정이 서렸다.

 

"나는 그대처럼 눈부신 자가, 다시 한번 내 눈앞에서 그 의지를 휘두르길 바라고 있었어."

"그럼, 바람대로 해 줘야지."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내쉬었다. 그리고 그 끝에 도약했다. 짙고 어두운 안개를 가르고 달려들면, 수많은 시간을 단련한 무기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스파크를 튀겼다. 묵직한 둔기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고, 밀레시안이 손목에 힘을 놓았다 쥐며 방향을 틀었다. 다시금 쏟아지듯 달려드는 밀레시안을 피해 베임네크가 발을 물렸고, 제 앞으로 금방 달려드는 밀레시안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이만한 희열이 있었던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해 이전과 같은 컨디션이 아닌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방으로 불길이 치솟는다. 사안의 발로르가 가진 타오르는 불길보다도 더욱 강렬한.

 

불길에 옷이 타오르고 살이 익었다. 그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 밀레시안은 그런 자였다. 마력으로도 막지 못한 공격이 몇번을 제 몸을 타격하거나 가르는 것을 느껴도, 어지러울 정도로 피를 쏟아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다고 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죽지 않는 영혼을 딛고 일어서서 다시 칼을 쥐는 자였다. 

 

다만 그 무기에 흔들림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제 것도 아닌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울고 웃고 또 사랑하던 자였으니 그 어떤 것이 제 앞에 있어도 마냥 모질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자가 돌아서고, 비참한 끝을 예견하고, 믿은 자에게 칼을 꽂혀도. 자신이 지탱하는 것마저 무너져내리고 신이 눈을 돌려도. 모든 것이 그를 부정하고 칼을 겨눠도. 그가 세계를 보는 눈은 변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그의 완전한 적이 되지 못하였으니. 

 

그런 존재가, 비로소 굳건하게 무기를 잡았다. 이전의 밤, 그 전에 몇번이고 쓰러졌던 모습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미련이나 감정에 흐트러지지 않는 명확한, 승리의 의지를 담은 눈빛.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오는 지는 이미 중요치 않다. 색 없는 회색의 눈빛에 광채가 서렸다. 화염을 휘감은 검이 단단한 몸이 도약하는 힘을 받아 쏟아졌다. 물러나지 않고 그것을 쳐내면 잠시 틈이 벌어졌다가도, 그 작은 틈조차 내어주지 않는다는 듯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지막 숨을 나누지 않겠나, 그대.

 

밀레시안은, 언젠가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입을 맞추고 숨과 온기를 나누면,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온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맨틱하지도, 애틋하지도 않다. 사랑스럽지도 끔찍하지도 않으며, 잔인하고 다정하지도 않다. 그저 기억될 뿐이다. 숨을 내쉴 때도, 들이마실 때도. 시야가 흐릿하거나 맑을 때도. 밤과 낮에도, 심지어는 밤의 어둠을 거두고 떠오르는 새벽까지도. 그리고 나아가겠지. 의지와는 상관없이. 

 

깡!

 

공기가 타는 냄새가 났다. 검을 감싸던 화염이 사그라든 것을 눈치챘다. 흔들린다. 틈이 벌어졌다. 밀레시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들고 있던 둔기를 놓아 중심이 무너지길 유도하고, 검을 뽑아 그 틈을 노렸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하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 몸이 쓰러졌다.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지 너는."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었으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통증이 가시지 못한 소리. 오래도록 천칭의 한 축을 자리하고 있던 마왕의 마지막 장면인데 이렇게 엉망일 수 있나. 밀레시안이 실소를 터뜨리고는, 그를 발로 밀어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낯설지 않은 시야였지만, 상황은 비슷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손을 뻗어 그 목을 쥐었다. 피부 위에 남은 떼었다 붙인 흔적은 고르지만은 않다. 서늘한 피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곧 끝날 것임을 예견했다. 

 

밀레시안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떠올린다. 쏟아지는 생각들, 과거의 회상을 의식 너머로 밀어냈다. 이 순간이 오롯이 그를 위한 것이기에, 그 무엇도 방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끝에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가라앉은 소리는 기어이 다 감추지 못한 감정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어?" 

 

단검을 들어 베임네크의 목에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아닌 검에 프라가라흐의 빛이 스며든다. 마치 그의 의지를 보이는 것처럼. 빛을 머금은 검 끝에 피가 맺혔다.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

 

베인이 손을 들어 검날을 잡았다. 마치 사랑하는 이의 뺨을 감싸듯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다만 프라가라흐가 그것을 알아챌 리 만무했다. 그 손에서 흐른 피가 검날을 타고 흘러 목 위로 떨어진다. 검날이 피부를 뚫고 피를 낸다. 마침내, 맞잡은 손이 흔들렸다.

 

"너도 내가 하는 말을 알겠지, 베인."

"내가 아는 그대라면…… 그것을 말로 뱉지는 않을테지."

"그래도…"

 

밀레시안이 망설이듯 말을 멈춘다. 익숙한 감정이 그 눈빛에 맺혔다.

 

"이름 한 번쯤은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나의… "

 

당장이라도 멎을 것처럼 숨이 느리게 흘렀다.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 끝에 모든 사람이 연호하던 영웅의 이름이 담겼다. 죽음의 순간, 마지막 숨을 담아서.

 

그 숨결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밀레시안이 입을 맞췄다. 동시에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고통에 흐트러지는 짧은 반응조차도 입맞춤으로 내리누르고, 목을 타고 넘어오는 혈액마저 삼킨다. 온도가 미미한 혈향이 숨결과 함께 넘어왔다. 로맨틱하거나 끔찍하기도, 사랑스럽거나 잔인하지도 않은 마지막 선물은 끝내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모든 순간에 떠오르겠지. 

 

긴 밤의 끝, 이별을 고하는 연인의 마지막 입맞춤처럼. 마지막 순간은 미련을 타고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어떤 이별도 이토록 고요할 수 없으리라. 

 

 

 

 

[베연] 영웅의 조각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4. 00:40

 * 드림주님의 요청을 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 25 2부 이전의 둘이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하고 길고 긴 시간이 지나 현대에 다시 태어났다는 

   설정으로 쓰였습니다. 베임네크는 기억을 가지고 있고, 밀레시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 드림주의 이름 및 모든 것이 언급됩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하게 굳은살이 붙은 손가락 끝에 유려한 선으로 조각된 영웅의 얼굴이 담겼다. 그 앞에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이 오롯이 담긴 듯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살아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바람이 불면 날릴 것 같은 생생함이 빛을 받아 반짝이기까지 했다. 그것은 베임네크가 손으로 빚어낸 작품들 중 손에 꼽는 수작이었지만, 그것을 사진 이외의 실물로 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베임네크, 그 혼자만 드나드는 공간에서만 영원할 것처럼 자리하는 것이었다.

 

베임네크는 그와 눈을 맞췄다. 이전의 삶에서도 이렇게 우러러보았던 것 같았다. 시선은 항상 아래에 있어도, 그는 그 어떤 자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자였다. 은은하게 먼 곳을 비춰 어둠을 거둬낸다는 그 새벽별의 명성과도 같게, 세계를 떠받들던 자였다. 불완전하게 끝난 그와 자신의 삶이 끝난 후에, 그 먼 훗날,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던 자신에게 그에 대한 기억이 깃들어버린 후에는 영원토록 그만을 그리며 살아갈 것만 같았다. 모든 기억이 선명했다. 마지막을 속삭이던 목소리도, 입 맞추고 떨어질 때 마주치던 복잡한 감정의 눈빛도. 그와 숨을 섞을 때 느껴지던 온기도. 모든 것이 손에 쥘 듯 선명했지만, 그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그를 잃어 영원토록 그리워할 자신만 있을 뿐.

 

그러니 빚어냈다. 어떻게든 그를 손에 담고 싶어서. 마지막 순간에서야 제게 어떤 감정을 비쳤던 그의 그, 짧았던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놓고 싶은 것처럼. 최대한 마모되지 않고 그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떠난 자들을 마음 안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이였다. 서늘한 빛을 하고 따듯한 성정을 가진 자였다.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무엇하나 떨쳐내지 못한 채 자신의 길을 가는 자였다. 그 자신의 마음을 함께 도려내야 하더라도, 그렇게 되었더라도 마지막까지 베임네크에게 삶을 끝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주고자 하던 자였다. 베임네크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만다. 뜨끈하게 돌아온 체온이 목을 감싸는 것도, 그의 마지막 말도. 그 말을 한 번만 더, 다시 듣고 싶었지만 그는 곁에 없었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시선이 담긴 밀레시안의 조각상과 베임네크. 그 자신이 있을 뿐.

 

 

 

 

 


 

그 오래 전, 베임네크는 손을 멈췄다. 몸의 힘이 꼬여 세계를 멸망시킬 위기에 있는 그에게는 오히려 끝이 편안한 길임을 아는데도 폭주하는 그에게 칼을 꽂아 넣지 못했다. 그의 손에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불길이 일렁이는 검은 그 아래에 세워진 채였고, 폭주하는 그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를 벨 수 없을 만큼 사랑해서일까. 그렇게라도 한순간이라도 더 그의 곁에 남아있고 싶어서였나. 

 

그를 사랑했다.

 

그로 인한 순간의 선택이 모든 변화를 가져왔다. 베임네크는 자신의 의무를 져버렸다. 비로소 자신의 순서가 왔을 때…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하는 순간에 그러지 못했다. 그러자 세계는 한번 되돌아갔다. 그 선택을 하게 만든 감정은 다른 것이 아닌, 포워르의 옛 왕, 발로르 베임네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세계의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만, 그가 품은 마음은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를 되돌리거나 무너지게 하는, 절대적인 애정이며, 사랑이고, 신앙이었다.

 

돌아간 시간에서는 다시금 기회가 있을 줄 알았건만, 다시 찾아온 기회는 밀레시안에 의해 뭉개졌다. 신이 손을 놓아버린, 질서를 잃은 세계 아래에서 밀레시안은 자신의 삶이 종식되기를 선언했으니까. 베임네크의 감정이 흐트러뜨린 일의 대가를 밀레시안이 그 자신의 죽음으로 갚고자 했으니. 

 

"나는… 당신이 걱정돼."

 

흐트러진 사랑 고백보다 더 진하게 남은 기억이 그것이었다. 원하지 않는 멸망을 보고, 모든 것이 종식되는 낭떠러지 앞에 선 자에게서 진심 어린 목소리가 떨어질 때, 그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약속한 마지막을 선사해주기 위해 이 생을 함께 마치자고 이야기했을 때. 베임네크는 그 에린의 어떤 자보다도 기쁘고도, 슬픈 존재가 되어있었다. 갈망하고 원하던 것을 손에 쥐고 끝나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관대하며, 동시에 잔인한 처사인지. 하지만 그 마왕은 가장 바라던 것을 손에 쥐고도 욕심을 버릴 줄을 몰랐다. 그를 손에 쥐고, 입 맞추고, 인사하며, 

 

다음 생에라도 너를 손에 쥘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났다. 전생의 기억이 서서히 스며들어 구체화 된 것은 성인을 갓 넘어서였으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며 수없이 도는 굴레 위에 있을 때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그저 작은 인간이 성인이 되는, 아주 짧은 시간. 그러나 그 이후의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공존했다. 그럴 때마다 베임네크는 조각에 손을 대었다. 그를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쏟아내었다. 섬세하고, 또 찬란한 영웅의 조각은 그렇게 몇번이고 빚어졌고, 새로 빚어질 때마다 선명하게 구체화하였다. 베임네크의 시선과 감정과, 모든 기억을 담아서.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기어이 그보다 남에게 먼저 넘겨주지 못해 학교 안에서 졸업이 계속 유예되었다. 모자람 없는 학점도, 성적도, 평판도 그가 졸업을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 흐름에 나름대로 흘러가듯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학관 입구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그를 마주했을 때는, 눈을 두 번이고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수없이 떠올리던 그 얼굴이었으니. 환경이 다르고, 삶이 달라도 그는 그였다. 성격도, 목소리도, 말도, 그의 삶의 태도마저도 이전의 기연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옛날, 그 과거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그의 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짝 쓸어올렸고,

 

"나의 그대.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지."

 

그 머리칼에 입 맞췄다. 

 

전생의 기억을 오롯이 가진 베임네크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기억도 없고 그렇기에 자연스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하던 그가 그 날 이후로 시야에서 애써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평생토록 감정을 속 안으로 눌러 참고 한 번 더 참아 갈등을 제 안에서 갈무리해버리던 그가 다음 생이 되어서야  "이 선배 미친 것 같아"하고 솔직하게 표출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베임네크에겐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기쁨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짊어진 부당한 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모습에 기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 그에게 발을 들였다. 낯선 존재에게 낯설다 말하고, 힘든 일은 적당히 제 손에 밀어가면서, 쉬고 싶을 땐 쉬고, 속삭이는 말에 꼬드겨지기도,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는 그의 평범함을 마음껏 만끽하고 또 사랑하고, 원했다. 이전의 무엇보다 강인하던 그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혹은 그와 같이.

 

그럼에도 저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는 순간에는 이전의 그 눈빛이 되살아난다. '당신을 어째야할지 모르겠어' 하는 그런 눈빛이, 시간이, 숨결이 머무는 것이 완전히 이전 삶의 그와 같았다. 그 수많은 전장 위에서 여유라곤 없던, 가라앉은 붉은 눈과 그가 겹쳐 보이곤 했다. 당신이 걱정된다고 했던…그 말도. 그 손길도. 그러면, 그때는 꼭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흔하디 흔한 소설의 구절처럼 존재감을 느끼지도 못했던 심장이 소리를 내며 뛰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안에 들어차고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아야 했고, 너를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영원토록 기다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어야 했다. 그는 많은 순간 베임네크의 호의에 당황했지만, 베인이 그 속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키고 있었는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와. 선배 예술한댔지."

 

어쩌다 그에게 보여준 작품을 보고 당연하게도 그는 그 자신을 조각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감탄하며 다른 누구도 실물을 보지 못한 베임네크의 가장 아끼는 수작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당연했다. 그것은 영웅인 밀레시안을 조각한 것이었으며, 지금 이곳의 그는 영웅도 무엇도 아닌 그냥 대학생일 뿐이었으니. 베임네크는 손을 뻗어 그의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베임네크 자신도 더는 마왕의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 죽음의 기로에서 묶여있지 않으니 너와 나의 체온은 미적지근했고, 우리는 더는 평생의 삶에 묶여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처럼, 혹은 그들보다 훨씬 더 평범한 삶을 살고, 똑같이 나이를 먹고, 비슷하게 죽어갈 자들이었다. 

 

"참 희한한 일이군…"

"음?"

"그대가 단 하나뿐인 존재라 그리 눈길이 가고 호기심이 새며 매듭을 지어줄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것인데…왜 지금도 이리 사랑스러운지."

"……또 낯뜨거운 소리 한다."

 

눈가를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그의 손을 끌어왔다. 간절하게 잡았던 전생의 어떤 시간처럼, 엄지에 살짝 힘을 줘 누르면 그 굴곡이 낯설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마 무엇보다 낯선 것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온도를 음미하듯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대가 그대이기에 사랑했던 것이기에 그렇겠지. "

 

그대가 밀레시안이나, 영웅이나,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밀레에레] 그의 부재

마비노기 2차2022. 12. 23. 20:47

* G25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메인스트림을 플레이하지 않으신 분의 열람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1.

 

 

이렇게 일찍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직 한참이나 작은 소녀였다. 왕실의 예법을 익히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자신의 마음과 욕심이 책임보다 앞에 있어도 괜찮을 나이였다.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이었다. 조금 더 놀고, 조금 더 떠들고, 모든 일은 하루의 숙제가 나이를 먹으며 늘어나듯이 천천히 늘어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일은 갑자기 일어났다. 차근차근 넘어왔어야 할 것이 산사태가 일어나듯 쏟아져 머리 위를 덮쳤다. 가족을 잃은 것에 슬퍼할 여유도 없이 책임을 손에 쥐어야 했으며,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곁을 지키던 이들이 과정에서 떠나고 사라졌지만 걸어가야 했다.. 누구의 도움이 없더라도,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자신의 의지로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가 단 하나의 후계자, 에레원이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울음을 쏟았다. 

 

..그 눈물에 흐려진 시야 속에 그가 있었다.

 

유일하게 제 옆을 지켜주던 자였다.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라고 불리던 이였지만, 아무것도 되묻지 않고 자신의 도움 요청에 응하는 이였다. 쏟아지는 울음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품 안에 받아주던 이였다. 그 날, 그 품속에서 에레원은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차마, 전달하지 못했지만.

 

"…왜 지금 그때의 일이 기억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그런 너를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걸까. 그래서 그렇게 모든 부탁을 명령의 형태로 말할 수 있던 걸까. 사실, 사실 너 역시도 내가 느꼈던 책임을 세계를 대상으로 느끼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너한테 내가 그 정도의 사람이고 싶은 걸까. 혼잣말처럼 내뱉는 모든 말이 닿지 않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닿기를 바랐다. 눈을 떠서, 뭐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잔소리하듯 타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밀레시안은 눈을 뜨지 않았다.

 

에레원은 이후로도 계속 그 앞을 드나들었다.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그 곳에 가 있곤 했지만, 그런 왕에게 무어라 말을 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부재는 에레원의 일이기도 했지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일이었기에. …그 병실 앞은 오래도록 상념이 쌓여갔다. 어쩌면 눈물이 쌓였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왕의 그 시간을 방해하려 들지 않았으므로 모르는 일이었다. 

 

 

 

2.

 

그 밀레시안은 원래도 많이 자는 자라고 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사실상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이 당연한데도, 밤을 이겨낸 그 밀레시안은 원래도 삶의 가장 긴 시간을 잠으로 보내는 자라고 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있었으니 그 누구도 그가 그저 '취침'상태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쌓여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적이라고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래 잠들어 있었으니. 

 

 

 

 

3. 

 

그러던 어느 날, 밀레시안이 눈을 떴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두어번 깜빡였고, 입술 사이로 한숨을 뱉었고, 제 귓가에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다시 눈을 감고, 숨을 뱉고. 다시 눈을 떠올리면, 많은 순간에 얼굴이 떠오르곤 하던, 어린 목소리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았다. 하지만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돌아선 이는 홀로 울음을 삼켜내는 것처럼 보였다. 느릿하게 잠에서 깨는 밀레시안은 작은 왕의 시간을 방해하는 대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잤더라. 하지만 잠든 이는 그것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상대의 반응으로 그를 꽤 오래 걱정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을 짐작할 뿐. 눈가를 문지르는 에레원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밀레시안은 습관적으로 제 머리를, 얼굴을 단장하듯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매만졌고, 다시 고개를 들 때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잠에서 다 깨지 못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에레원, 나를 봐요."

 

나른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네? 조르는듯한 투의 목소리가 공기를 간질이듯 나직이 흘러갔고, 길고 흰 손가락이 소녀의 팔을 감쌌다. 늘 내리면 피해지던 시선이 아래에 있으니, 에레원은 그 시선을 어떻게 피해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매던 끝에야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불렀으면 말을 해!"

 

어쩔 줄 모르고 붉어진 뺨의 홍조가 선명했고, 모든 걱정이 쏟아지는걸 애써 막은듯한 눈가가 붉었다. 작은 왕은 이 간질거림이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고 당황했고, 밀레시안은 그런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지만, 그 목소리가 작은 왕에게 얼마나 절대적일지는 그 밀레시안과 왕을 포함한 모두에게 자명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도 밀레시안이 입을 열었다. 아이가 어려운 어른에게 초콜릿을 조르듯이, 아주 조심스러운 투였다.

 

"나 한 번만 안아줘요."

"뭐?! 너 지금 그게…!"

"아무도 없잖아요, 얼른."

 

당황스러운 반응에도 태연했다. 그 표정 없는 밀레시안에게 늘 쩔쩔매던 왕이 태연하게 웃는 표정을 보고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밀레시안인이 손끝으로 잡은 팔을 톡톡, 건드린다. 하얗고, 얇은 손가락. 막 잠에서 깬 잠긴 눈, 지금 아니면 못하는데. 속삭이는 목소리... 모든 것이 그 밀레시안의 공기처럼 가라앉아 있었지만 에레원의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쿵, 쿵, 뛰는 심장 소리가 그를 잃을까 걱정되고 무서워할 때와는 다르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 심장 소리에 말문이 막혀 잠시 적막이 공기를 누르고 지나갔다.  

 

"… 이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쩔 건데?"

 

 둘 주변의 공기를 울리는 작은 투덜거림과, 

 

"그럼, 내가 책임이라도 질까요?"

 

 장난 섞인 작은 목소리가 섞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 끝에, 얇고, 작고, 조심스러운 팔이 그 검은 머리의 밀레시안을 끌어당겼다. 그가 쓰러져 전장에서 멀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그에게선 아직도 은은한 비 냄새가 났다. 비 냄새, 풀냄새. 옅은 탄 냄새. 그의 전장에 자리하는 것들이었겠지. 일이 없을 때는 잉크나 종이책 냄새 나곤 했는데… 고개를 숙인 자의 검고 짧은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 귓가를 가만히 쓸어내리면 따끈한 체온이 만져졌다. 마주 끌어안은 품 안에서는 작은 호흡이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지만, 그런데도 상대의 모든 것이 선명했다. 걱정하던 모든 순간이, 침대에 쌓인 상념들이 조용히 녹아내렸다. 

 

"이제 좀 괜찮아요?"

"그건 내가 네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요. 당신 덕분에."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난생 처음 보는, 편안히 웃는 얼굴이 작은 왕의 손안에 담겼고, 기어가듯 작은 답이 눈물 맺힌 채 떨어졌다. 

 

"이제 괜찮아. …네가 돌아왔으니까."

 

 

 

 

찬연히 스러지는 잔열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45

 

 

* G25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메인스트림의 플레이를 마치고 일독을 권장합니다.

* 베임네크사랑해이제정말시리즈따로파야한다 

 

 

 

 

 

 


 

 

흐름이 멈춘 세계에서 베임네크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것이 멈추지 않는 쳇바퀴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적자의 운명을 받고 자신의 쳇바퀴를 멈춰줘야 할 이는 이미 수없이도 포기하거나 실패했고, 덕분에 진작 끊어졌어야 하는 삶은 비슷한 구간을 몇번이고 맴돌았다.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이 꺼졌다가 과거의 전쟁터로 돌아오면, 그 어떤 권태감보다도 깊고 끝없는 공허감이 몰아쳤다. 그 긴 삶을 살아오는 동안 느낀 모든 감정들은 지치고 지쳐 퇴색되어버리곤 했건만 이 공허감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 언제나 그것은 삶에 묶인 마왕을 끝없이 뒤흔들고 삼켜냈다. 삼켜져 좌절할 법도 하건만, 그는 그 공허감으로 말미암아 되려 간절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가망 없어 보이는 내기를 붙잡고 매달려 계속해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굴레 속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지.

 

무겁고 깊은 계단에 발을 디뎌 내려갔다. 조곤조곤 대화하는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그 모습들이 눈에 밟혔다. 세 사람의 인영. 그중에 유독 검은 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상의 암흑마저 품어버린 것 같은 차분한 검은 빛과 그의 존재감을 선명히 새기는 붉은 빛을 가진 자였다. 테흐두인의 어둠을 뚫고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자신을 마주했을 때, 베임네크는 확신했다.

이 눈부신 자가 바로 자신의 굴레를 끊어줄 구원자임을.

 

 

 

 


 

 

모든 맹약이 거둬졌다. 베임네크는 비로소 자신의 굴레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그것을 해낸 이가 누구인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 균열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겪어 알면서도 기꺼이 겁 없이도 발을 들이던 그, 밀레시안이겠지. 그렇게 들어와서,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검을 맞대주던 그였다. 수없이 끝을 맺어달라고 말해도, 그 간절함을 비쳐 보여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를 망설이는 자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는 숫자만큼 밀레시안의 숨이 끊어졌다. 대부분은 무기를 들지도 않거나, 중요한 순간에 망설였던 까닭이었다. 밀레시안이 누운 자리에서 다시 눈을 뜰 때. 그의 곁에 칼을 꽂고 내려다보는 베임네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날 밤이 생각나는군, 그대."

"그래요. 다를 것 없군요."

"하지만 그때처럼 언젠가 끝나지는 않을 거야. 일어나 그대. 검을 쥐어. 끝을 맺을 시간이야."

 

밀레시안은 답하지 않은 채 시선을 들었다.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가 서로에게 멈춘 채 시간이 흘렀다. 가쁜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고 두 사람이 머문 공기를 적막이 지긋이 눌렀다. 그 속에서 차분히 눈을 감은 후 숨을 고르고 다시 눈꺼플을 들어올린 밀레시안이 마른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날 밤,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요?"

"그대에 관한 일을 내가 잊을 리는 없지. …하지만 그대. 나의 대답도 떠올려줬으면 좋겠는데."

"베임네크."

 

밀레시안은 피로 물든 하얀 손가락으로 그를 밀었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투가 재개되는 것을 알리는 장전 소리가 들리자 베임네크가 땅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날이었다. 붉고, 덥고, 끊임없이 아프기만 한 날이었다. 모든 숨소리에는 밀레시안의 피 냄새가 섞여 있었고, 모든 공격에 피를 보는 것도 오직 그 밀레시안 뿐이었던 그 날. 둘 중 누군가의 밀레시안의 피와 살이 바닥을 구른 덕에 더욱 붉게 물들어가던 반호르의 흙바닥 위. 쉼 없이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며 누군가는 미래를, 누군가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되새기던 날이었다. 시간이 흘러 둘은 다시 마주했다. 모든 밤이 지나갔고, 비로소 끝에 다다른 곳이었다. 이 곳에서 그 날을 떠올렸다. 실린더에 결정을 장전하던 밀레시안이 팔을 내리고, 자신의 맞은편에 선 이를 마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 날, 그 순간 소리로 내지 못하고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던 그 말에 목소리를 실어 내보냈다. 둘 모두의 마음을 짓누르는 말이었다. 자신의 말이 의미없음을 아는 자가, 이 말에 서운함을 품을 자에게.

 

"내가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요."

"이전과 같은 답을 해 주지, …나의 그대."

 

베임네크는 눈꼬리를 떨어뜨리면 퍽 서운한듯 말했다. 그리고 도약했다.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이의 검을 가드실린더로 막아낸 밀레시안의 실린더에서 응축된 불꽃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폭발해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 날과 같았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베임네크는 밀레시안을 몰아붙였다. 몇번의 폭음과 검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서야 베임네크가 입을 열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

"그 실낱같은 기대는 충족되지 않아. 그대… 부디."

 

끝을 맺어 줘. 그것이 입 밖에 나오는 말은 아니었지만, 밀레시안이 그 뜻을 읽기엔 충분했다. 그의 질리도록 긴 삶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그의 표정이 그 멈추지 않는 쳇바퀴 위에서 나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 빛나는 밀레시안을 끝으로써도, 시작으로서도, 혹은 그 삶의 가장 찬란한 빛으로써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끝을 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며 찬란한 것인지... 이제는 정말로 공감한다 말할 수 있었으니.

 

두 사람이 다시 밀려났고. 몇번을 다시 부딪혔다. 바닥에서 화염이 끓어오르고 구름이 멈춘 하늘에서도 번개가 쏟아져 내렸다. 그의 타오르는 눈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밀레시안은 자신이 바란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수없이도 봐온 눈빛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마주한 밀레시안이 한 순간도 체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죽기를 바란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밀레시안이 놓친 많은 이들 중 그 밀레시안이 누군가를 죽여 나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심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었다. 

 

… 그런데도, 그 순간 자신의 끝을 확신했다.

 

그들 모두가 그랬고, 눈앞의 베임네크가 그랬다. 너무도 익숙한 눈빛이었으며, 너무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마주 본던 눈빛과 열기가 훅 가까워지며 날카로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붉은 눈이 닿을 거리에서 마주쳤다. 굉음이 물러가고, 서로에게 대치하는 힘을 남긴 채로 서로의 시선에 오롯이 서로만이 담겼다. 서로를 이따금 덮곤 하던 먼지와 안개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한 줌씩 먹히는 듯 가라앉았고, 검과 방패를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시선과 함께 숨소리가 섞였다. 그 숨소리마저 가라앉을 때 즈음, 거대한 인영이 쓰러졌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래요."

"……."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쓰러진 자의 앞에 선 밀레시안이 가만히 눈을 내리감고 심호흡을 했다. 수많은 것이 속에서 끓어올라 넘쳐흐를 것만 같다고 느꼈다. 이런 끝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가. 한편으로는 확신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해오는 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가졌던가. 그는 죽을 것이다. 세계는 그렇게 흘러왔으므로. 자신은 수많은 이를 죽이거나 잃어가며 여기까지 도달했으므로. …또한, 그에게 그것이 진정한 구원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래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하하…"

 

끈질기게도 서로를 마주하던 시선들이 흐트러졌다. 수많은 감정이 뭉쳐 쏟아질 것만 같았고, 터져버릴 것 같았으며, 죽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며 가슴을 누르고 있을 것 같기도 한. 이 순간이 마지막임에도, 마지막이라서 뱉어낼 수 없는 것들이 각자의 마음에서 조용히 침잠했다. 그 끝에 베임네크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밀레시안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운명을 무엇보다 확신하고 오래도록 그것을 준비해 오면서도, 운명을 거스를 준비 역시 차고 넘치게 하던 자. 버려질 선택지임을 확신하면서도 모든 것을 끌어안는 자였다. 그것이 영원토록 불가능하거나 나아갈 수 없게 무겁거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는 자였다. 그것이 그 스스로를 수없이 깎아내린 경험을 해왔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였다. 이 땅의 무엇보다 고결한 존재여, 

 

"그대는… 너무나도 눈부시군."

 

밀레시안이 그를 내려다봤다. 손을 뻗어 그의 검을 쥐면, 천천히 손이 풀리고 그 검이 손에 쥐어졌다. 놀랍도록 무거운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의 삶을, 미련을, 모든 의미들을 담은 것이었으므로. 공허하던 모든 것을 끊어낼 검이었다. 그의 체온처럼 차디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무게가 버거운 것처럼 팔이 떨렸다. 두려운 것처럼 숨이 흐트러졌다. 

 

모든 것이 끝날 것임을 알았다. 그 순간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자, 우리의 여정을 끌어온 그의 가장 간절한 순간이었다. 수없이 되새겼다. 세계를 위한 것이며, 그를 위한 것이고, 가장 올바른 길이었다고. 그러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침묵이 흘렀다. 베임네크는 검을 들며 감겼던 상대의 눈이 다시 자신의 시선을 마주한 것을 보았다. 오롯이 자신에게 담기는, 오롯이 자신을 담는 눈동자를. 비로소, 지금. 말로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을 담은 슬픔이 제 앞에 떨어지는 것을. 당신을 잃기 싫다는 인간적인 욕망을 종극이 되어서야 쏟아내는 존재를. 어떤 신들보다 단단하고 굵은 모습으로 그 스스로를 단단히 잠그고, 자신보다도 타인에 대해 말하던 존재가, 

 

"나는… 못하겠어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밀레시안은 지금 순간을 후회할 것임을 알았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사라져가는 그를 보며 이번에도 실낱같은 희망은 거짓이었으며 허황한 꿈이었음을 알았다. 주저앉아 그를 마주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눈가를 서늘한 손이 천천히 쓸었다. 그 감각마저 흐릿했고 마주 보는 눈빛 역시 주변의 안개에 삼켜져 감에도 베인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눈에 담겼다. 그리고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하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군……."

 

흩어지는 검은 안개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에 담았다.

스러지는 잔열 위로 후회 섞인 감정이 방울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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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 속의 불협화음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45

 

 

*

G24, 2부의 스포일 수준이 아니라 스크립트 자체와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날조 낭낭해요) 플레이 후 일독을 권합니다.

 

!! 트리거에 주의하세요 !!

유혈보고싶어서 쓴 글입니다. 가학성/잔인함/고어 위주로 쓰여졌습니다.

그 퀘(제목) 특성상 대응하지 않은 채 상해를 입는 밀레시안(피해자)의 시점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 TMI : 밀레시안이 검은 용기사의 날개를 달고 있습니다.. 왜 쓰냐면.. 보시면 압니다.. 

 

최초발행 2020.05.07

폰트수정 2020.05.29

 

 

 

 

 

 

 

시야가 붉었다. 

 

머리를 맞았던가. 아프진 않은 것을 보니 이전의 상처일 수도 있겠다고, 밀레시안은 태연하게 그지없는 생각을 했다. 데이고, 찢기고, 뚫린 상처가 여러 번 생겼지만,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그와의 싸움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어느새 다가온 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타오르는 시선. 그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다. 밀레시안의 앞에 서서… 그 밀레시안을 오롯이 시야 안에 담을 때, 그 순간에 무언가 많은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눈을 했다. 

 

기대감. 고양감. 혹은…쾌감. 저렇게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그 단어들을 그에게 입히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자신의 어떤 면들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지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밀레시안은, 그저 존재했기에 존재했을 뿐인데.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위에 실망감을 덧씌운 얼굴을 한 베임네크가 밀레시안을 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 나를 실망하게 하는군, 그대. "

 

그가 자리에 쓰러질 때마다 숫자를 헤아리던 베임네크는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그 숫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상대가 몇 번씩 생사를 오가는 동안에 한번도 진지하게 검을 뽑지 않았음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그대. 나와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걸 원하지 않나? 내가 이렇게 원하는데…. 슬픈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눈가를, 뺨을, 턱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던 붉은 눈의 밀레시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실망, 하냐고요. 

 

" 대체 내게 무엇을 기대했나요. "

" ……. "

" 베임네크. 내가 당신을…. " 

 

밀레시안의 손이 베임네크의 얼굴에 닿았다. 마주 본 얼굴에 입 모양으로 무어라 속삭이면, 갑옷을 두른 거친 손이 밀레시안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밀레시안의 손이 그 팔을 붙들었지만, 여태 그래왔듯이 그것을 뿌리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대신, 다정히 쓰다듬는 손길만이 있었다.

 

….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소란스러운 반호르에서도 그 소리는 선명했다. 아무리 영웅이라 불리는 이지만 육체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목이 부러지자 마왕의 손에 으스러져 늘어졌다. 그런 그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베임네크는 억지로 끌어올리던 입꼬리가 더는 제 뜻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퍽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 어서 일어나, 나의 그대. 나는 그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

 

끊이지 않는 피와 싸움을 딛고, 그 전쟁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손에 넣었다. 강한 자들을 계속 상대한 끝에, 진정한 끝에 도달했다. 이 마왕은 끝의 성취감보다는 지루함을 느끼는 게 먼저였다. 아니, 성취감이 있었긴 했던가? 이후에는 의미가 없었다. 더 이상 제 흥미를 끌 수 있는 어떤 것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포워르의 왕이 되었지만, 아래에 있는 것들은 해를 거듭해도 같은 일들을 반복할 뿐이었다. 닿지 못하고 추락하는 이들. 의지도 없는 이들. 늘어가는 지루함, 기대도 없던 실망감. 그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그 어떤 마왕의 감정도, 의지도. 그 밖의 여남은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공허 속으로 빠져들게 할 만큼 기나긴 삶이.

 

그 삶에 나타난 것이 그였다. 밀레시안. 끊이지 않는 싸움을 딛고 끝을 모르고 강해지는 자. 죽지 않는 육체를 가진 자. 기우는 세계를 몇 번이나 바로 세우고, 신이 방해물로 여길 정도의 영웅적인 존재. 그를 만나기를, 그와 이렇게 검을 맞대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와의 전투에서는 제 안에서 감정이 흘러넘치는 기분이었고, 공허라곤 한 줌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보다 열정적으로 죽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던 것. 원하던 전투, 시간. 그 모든 것이었다. 그래, 그런 그에게는 그의 태도에 실망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하기 그지없었다. 

 

" …매정한 그대."

 

밀레시안은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다고 생각하며 숨을 내뱉었다. 온몸을 감싸던 통증이 물러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베임네크의 얼굴을 시야에 담는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 태도가 이런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약점을 내보인 건 베임네크, 당신인데.  


" 당신은 패를 너무 일찍 들켰어요, 발로르. "
" 그래, 그렇군. 내가 너무 힌트를 많이 주었나. "

 

그대의 앞에서는 이렇게도 마음이 약해져서야. 베임네크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검을 내리꽂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피부가 찢기는 소리. 밀레시안의 삼켜지는 신음이 들렸다. 그렇다면 다른 즐거움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는 베임네크의 눈에 다시 웃음기가 어렸다. 또 모를 일이지. 그의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가까우니, 인간들이 쉽사리 패배하고 마는 지긋지긋한 고통에 가두면 전의를 회복할지.

 

 

 

 

고어에 주의하세요! 신체훼손의 직접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

 

 


 

검이 뚫은 상처에 손을 뻗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피부는 쉽게 갈라져 속을 내보였다. 으스러진 뼛조각, 굵은 혈관들. 죽지 않고 움직이는 살덩어리들. 왈칵 솟구치는 피가 그의 검은 갑옷과 얼굴에 튀었다. 고통에 바르작대던 밀레시안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쥔 것 같았지만 잠깐이었다. 서서히 힘을 잃어간다. 하지만 육체가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다. 벌어진 가슴 사이로 생생하게 뛰는 심장을 눈에 담으며 발로르는 작게 웃었다. 

 

" 생기가 넘쳐. 그대의 얼굴에서는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없었는데. "

" ……. " 

" 언제나 그대는 어딘가 통달한 것처럼 보였지. 당연하게 도와달라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 이유마저 그대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어. 그저 운명에 따르는 빈껍데기처럼…. 그런 그대가 나와 다른 것이 있나? "

 

베임네크의 서늘한 손이 고동하는 심장 위를 쓸고, 손에 쥐었다. 그렇다고 그의 존재를 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질적이로 생동감 넘쳤으므로. 그는 손에 쥔 심장을 들어 올렸다. 이어진 것들이 툭, 툭 끊어지며 피를 쏟았고, 밀레시안은 숨이 멎는 것을 느낀다. 이질적으로 뛰는 자신의 심장을 눈앞에 두고, 베임네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 밀레시안. 그대가 이렇게 심장이 뛴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지 않나.  "

 

마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베임네크가 중얼댔다. 멈춘 심장 위에 입 맞추고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곧 그는 다시 일어나서 이 고통을 계속할 것이었다.

 

 

 


 

몇 번이나 숨이 멎었던가. 헤아릴 수 없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피로 흥건히 젖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던 차에, 몸을 뚫는 격통을 느꼈다. 수십번도 더 뚫리고, 피를 쏟는 몸 위를 베임네크의 몸이 누르고 올라왔다. 심장을 뜯고, 사지를 잘라내고, 목을 비틀고. 또 어땠더라… 지금, 지금은.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낮은 비명이, 신음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핏줄기에 먹혀들었다. 

 

" 그대, 그만 참는 게 어때. 그대가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내 마음이 아플 지경이야. " 

 

응? 나긋한 숨소리가 귓가에, 목덜미에, 어깻죽지에 내려앉았다. 조르듯, 재촉하듯 뱉는 말들이 애처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베임네크의 검은 갑옷에 감긴 손이 밀레시안의 몸 위를 쓸었다. 몇 번을 으스러뜨려도 일어나는, 일어나서 운명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이를. 더듬는 손은 이내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멈춰 섰다. 곧 부러질 것 같은 날개는 그 몸에 뿌리를 내리고, 그 몸에서 흐른 피를 머금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베임네크는 시선을 들어 붉은 눈으로 그 날개를 훑었다. …문을 연 자의 날개인가. 조용히 중얼거리면, 밀레시안이 반응했다. 

 

" ……. "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 존재의 붉은 눈이 마주했고, 베임네크의 눈이 휘어 웃음 지었다. 공허한 눈빛에서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베임네크의 손이 그 날개의 뿌리에 가 닿았다. 손에 힘을 주고, 그 날갯죽지를 뽑아낸다. 투둑, 툭….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 피가 떨어지는 소리. …지고한 영웅의 짧은 비명. 그것이 전부인 짧은 순간이었지만, 베임네크는 오늘 한 행동 중에 그나마 가장 의미 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개를 잡을 때, 쥐어볼 때, 뽑아내는 모든 순간에 밀레시안은 잘게 반응했다. 고통 안에서도 감정을 숨겼다가, 내비쳤다가, 아주 잠깐은 말리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날개가 세 개만 있었어도 그가 검을 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임네크는 비틀린 생각을 했다. 질투 같은 모양을 했다. 수많은 고통을 주어도, 이렇게 간절히 애원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이가, 육체의 고통 외의 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그렇게 흔들리게 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라는 것이 이토록 실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베어냈다. 말을 못 하는 모양으로. 짓밟고, 죽이고, 숨통을 끊어둔다. 그의 주변에 알 수 없는 빛과 함께 그가 부활하면, 그 아래 불을 피워 태워죽였고, 다시 눈을 뜨면 목을 베고, 다시 눈을 뜨면 사지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고통 속에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은 걸 확신하는데. 그런데도. 

 

" …여유가 없어 보여요, 발로르. " 

 

자신의 목을 쥔 그를 보며 밀레시안이 흐리게 웃었다.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된 사지에서 고통이 일었다.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땅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자에게는 낯설지도 모르는 고통이었다. 일방적인 폭력, 살해. 그 사이사이에 이어진 속삭임들.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숨이 끊어지면 고통이 물러갔고, 이어지면 다시금 닥쳐왔다. 지옥 불에 던져지면 이런 느낌일까. 아득함 속에 밀레시안은 생각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발로르 베임네크는 퍽 슬픈 표정을 했다. 

 

"그대. 이제 그만 포기하고 검을 쥐지 그래."

 

응? 애처롭기까지한 목소리가 귓가에 앉았다. 이어서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곧 죽겠지. 숨이 끊어지는 순간은 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것이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육체의 고통으로는 밀레시안을 설득해낼 수 없었다. 고통은 언젠가 끝나는 것이었다. 부활하면 그만이었고, 치료하면 그만이었고. 아프던 순간은 길고 많았지만, 그것을 되짚어서 고통이 되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든지 견뎌내면, 견뎌낼 만한 일이었다.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대는 알잖아…나를 이해하지 않나?"

 

우리는 닮았어. 이 공허가 무엇인지 그대는 알고 있잖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세상의 정상에 선 이의 공허함이 묻어나는 그 말이었다, 자신을 동정해달라고, 이해해달라고. 이해하고 나를 위해 칼을 뽑아달라 간절하게 뱉는 그 말이었다. 우리가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올곧은 세상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이 공허함 대신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가 말하던 의미 없는 꿈을 떠올리고 만다. 그것을 이뤄줄 수 없다면 그저, 그의 간절함 하나 정도는 이뤄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만다.  

 

제 목을 쥐고 떨리는 검고, 단단한 손 위를 밀레시안이 쓸었다. 

꽤 오랜 시간 전. 수십번 죽어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밀레시안은 끝을 예상했다.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그가 겪은 모든 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세상의 많은 것이 그 손에 달려있다. 그 끝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 세상은 제 곁에 남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늘 잃어왔다. 죽이기도 했고, 손쓸새 없이 놓치기도 했다. 당신이 그 손으로 뽑은 날개는, 내 유일한 오점의 흔적이었다. 지고한 영웅이라고. 그 영웅은 이렇게 실수를, 잘못을 반복하는 이였다. 아마 나는 당신을 죽이게 되겠지. 그것이 실수인지,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인지, 오점인지. 수십번을 되짚으면서 고통받게 되겠지. 

 

또 나는 이렇게 안타까운 꼴을 하는 당신을 구하지 못하고 그것이 최선이었다 위로받겠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왜 이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더라. 왜 당신에게 맞서 싸우지 않았더라. 수십 번을 죽어서인지 무엇 하나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흐려진다. 여지껏 검을 쥔 적 없는 밀레시안은 지금, 이 순간 이제와서야 전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끝에 말했다. 당신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는. 

 

" … 미안해요. "

 

어차피 그때가 올 거라면, 최대한 미루고 싶어. 그게 내 욕심이라도 말이에요.

제 목을 감싼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밀레시안은 뱉지 못한 말을 안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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