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베인] 마지막 숨
마비노기 2차/밀레베인2022. 12. 24. 00:56*G25의 스포일러를 포함하며, 베인에 관련한 개인적 해석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트리거 워닝 : 신체 절단, 유혈, 살해, 보는 관점에 따라 네크로필리아적 요소가 있을지도….
비로소 찾아온 끝. 멈추어진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의 끝에 당연하다는 듯 걸어오는 밀레시안을 보며 여러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다. 그 생각 끝에 낸 결론이란, 몇번이고 반복된 시간이 드디어 원하던 모습으로 형체를 갖추었다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완벽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베임네크가 손에 쥔 검에 화염이 타올랐다.
몇번이고 좀 더 편안 자리에서 마주쳤고, 불편한 자리에서도 이어가는 싸움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둘 사이의 공기 에는 전에 없던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흐릿한 회색빛 눈동자들이 마주했다. 흔들리던 감정이 조용히 침잠한다. 다시 떠올린 눈빛에는 얼핏 살기로 읽을 수 있는 감정이 서렸다.
"나는 그대처럼 눈부신 자가, 다시 한번 내 눈앞에서 그 의지를 휘두르길 바라고 있었어."
"그럼, 바람대로 해 줘야지."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내쉬었다. 그리고 그 끝에 도약했다. 짙고 어두운 안개를 가르고 달려들면, 수많은 시간을 단련한 무기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스파크를 튀겼다. 묵직한 둔기는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고, 밀레시안이 손목에 힘을 놓았다 쥐며 방향을 틀었다. 다시금 쏟아지듯 달려드는 밀레시안을 피해 베임네크가 발을 물렸고, 제 앞으로 금방 달려드는 밀레시안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이만한 희열이 있었던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해 이전과 같은 컨디션이 아닌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방으로 불길이 치솟는다. 사안의 발로르가 가진 타오르는 불길보다도 더욱 강렬한.
불길에 옷이 타오르고 살이 익었다. 그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다. 밀레시안은 그런 자였다. 마력으로도 막지 못한 공격이 몇번을 제 몸을 타격하거나 가르는 것을 느껴도, 어지러울 정도로 피를 쏟아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다고 해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죽지 않는 영혼을 딛고 일어서서 다시 칼을 쥐는 자였다.
다만 그 무기에 흔들림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제 것도 아닌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울고 웃고 또 사랑하던 자였으니 그 어떤 것이 제 앞에 있어도 마냥 모질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자가 돌아서고, 비참한 끝을 예견하고, 믿은 자에게 칼을 꽂혀도. 자신이 지탱하는 것마저 무너져내리고 신이 눈을 돌려도. 모든 것이 그를 부정하고 칼을 겨눠도. 그가 세계를 보는 눈은 변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그의 완전한 적이 되지 못하였으니.
그런 존재가, 비로소 굳건하게 무기를 잡았다. 이전의 밤, 그 전에 몇번이고 쓰러졌던 모습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미련이나 감정에 흐트러지지 않는 명확한, 승리의 의지를 담은 눈빛. 그 의지가 어디에서 나오는 지는 이미 중요치 않다. 색 없는 회색의 눈빛에 광채가 서렸다. 화염을 휘감은 검이 단단한 몸이 도약하는 힘을 받아 쏟아졌다. 물러나지 않고 그것을 쳐내면 잠시 틈이 벌어졌다가도, 그 작은 틈조차 내어주지 않는다는 듯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마지막 숨을 나누지 않겠나, 그대.
밀레시안은, 언젠가 낮게 속삭이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입을 맞추고 숨과 온기를 나누면,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온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맨틱하지도, 애틋하지도 않다. 사랑스럽지도 끔찍하지도 않으며, 잔인하고 다정하지도 않다. 그저 기억될 뿐이다. 숨을 내쉴 때도, 들이마실 때도. 시야가 흐릿하거나 맑을 때도. 밤과 낮에도, 심지어는 밤의 어둠을 거두고 떠오르는 새벽까지도. 그리고 나아가겠지. 의지와는 상관없이.
깡!
공기가 타는 냄새가 났다. 검을 감싸던 화염이 사그라든 것을 눈치챘다. 흔들린다. 틈이 벌어졌다. 밀레시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들고 있던 둔기를 놓아 중심이 무너지길 유도하고, 검을 뽑아 그 틈을 노렸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하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 몸이 쓰러졌다.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지 너는."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었으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통증이 가시지 못한 소리. 오래도록 천칭의 한 축을 자리하고 있던 마왕의 마지막 장면인데 이렇게 엉망일 수 있나. 밀레시안이 실소를 터뜨리고는, 그를 발로 밀어 눕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낯설지 않은 시야였지만, 상황은 비슷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손을 뻗어 그 목을 쥐었다. 피부 위에 남은 떼었다 붙인 흔적은 고르지만은 않다. 서늘한 피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곧 끝날 것임을 예견했다.
밀레시안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떠올린다. 쏟아지는 생각들, 과거의 회상을 의식 너머로 밀어냈다. 이 순간이 오롯이 그를 위한 것이기에, 그 무엇도 방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끝에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가라앉은 소리는 기어이 다 감추지 못한 감정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어?"
단검을 들어 베임네크의 목에 가져다 댔다. 아무것도 아닌 검에 프라가라흐의 빛이 스며든다. 마치 그의 의지를 보이는 것처럼. 빛을 머금은 검 끝에 피가 맺혔다.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
베인이 손을 들어 검날을 잡았다. 마치 사랑하는 이의 뺨을 감싸듯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다만 프라가라흐가 그것을 알아챌 리 만무했다. 그 손에서 흐른 피가 검날을 타고 흘러 목 위로 떨어진다. 검날이 피부를 뚫고 피를 낸다. 마침내, 맞잡은 손이 흔들렸다.
"너도 내가 하는 말을 알겠지, 베인."
"내가 아는 그대라면…… 그것을 말로 뱉지는 않을테지."
"그래도…"
밀레시안이 망설이듯 말을 멈춘다. 익숙한 감정이 그 눈빛에 맺혔다.
"이름 한 번쯤은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나의… "
당장이라도 멎을 것처럼 숨이 느리게 흘렀다.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 끝에 모든 사람이 연호하던 영웅의 이름이 담겼다. 죽음의 순간, 마지막 숨을 담아서.
그 숨결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밀레시안이 입을 맞췄다. 동시에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고통에 흐트러지는 짧은 반응조차도 입맞춤으로 내리누르고, 목을 타고 넘어오는 혈액마저 삼킨다. 온도가 미미한 혈향이 숨결과 함께 넘어왔다. 로맨틱하거나 끔찍하기도, 사랑스럽거나 잔인하지도 않은 마지막 선물은 끝내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모든 순간에 떠오르겠지.
긴 밤의 끝, 이별을 고하는 연인의 마지막 입맞춤처럼. 마지막 순간은 미련을 타고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어떤 이별도 이토록 고요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