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에밀레] 루에리한테 메이드복을 입히고 싶어

Etc.2023. 2. 12. 01:04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가.

 

망설임으로 가득한 부탁의 말 끝에 걸린 소원이라는 표현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그것보다도 엔나의 앞에서 가끔씩 물러지는 루에리 자신의 그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시간 동안 물러져서 이런 부탁이나 들어주고 있다니……. 루에리는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벗어던지고 냅다 속에 들어찬 말─미쳤냐든가─을 뱉지 않으려 상당히 애를 써야 했다. 어떻게 사이즈도 이렇게 딱 맞는 것을 가져왔는지─마을에서 남녀노소 이런 옷을 즐기고 있는 밀레시안들의 수를 생각하면 이건 아마 제일 아무 문제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몸이 편한 것이 심적으로 이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편해서 불편한 옷, 불편한데 편한 옷. 끔찍하게 이상한 취향……….

 

루에리는 온갖 불만스러운 소리를 삼키며 앞치마를 집어 어깨에 걸쳤다. 이렇게 저렇게 입는 거라고 설명해 주던 엔나의 몸짓을 떠올리면서. 제 손에 쥐어주던 손길을 떠올리면서. 그래도………정말 이건 아니지 않나. 잠시 뜯어버릴까 고민하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망설이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 앞에서 30분은 고민한 것 같았다. "루에리……혹시."

 

"……리본 묶어줄까?"

 

그 목소리에서는 망설임과 떨림, 미미한 흥분과 기대감, 끝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설레임이 다 쏟아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수락했다. …루에리는 이제 조금 체념하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데 고작 옷 하나 입는 걸 못해줄 것 없다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보다 더한 꼴─이런 방향으로는 상상도 못 할─을 전 생애에 걸쳐서 많이 보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다 싶기까지 했다. 어쩌면 엔나에게 약하게 구는 것이 이전보다 더해졌다는 생각도 함께 따라붙었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그 손을 잡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을. 

 

 


리본을 당기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 유행에 진심이었던 밀레시안들이 곱고 고운 옷감을 골라 만든 끈이 풍성하게 손에 잡혔고, 조심스레 서로 묶으면 원하는 대로 모양이 잡혔다. 쉽게 풀리지도, 흐트러지지도 않는 천의 질감. 리본이 많은 옷들을 입다 보니 익숙해진 손길이 천을 당겨 예쁘게 모양을 잡았다. 좌우 대칭으로, 늘어지는 각도도 맞춰서 말이다. ……너무 예쁘다. 이렇게 예쁠 수가 없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얇은 체형을 따라 만들어지는 곡선. 그 아래로 풍성한 치마결을 따라 흘러내린 리본이, 부탁에 마지못해 거절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이 손길을 받아주는 순간까지. 어떡하지. 엔나는 결국 리본을 다 묶고도 그 얼굴을 볼 자신이 없음을 깨달았다. 아마 부끄러울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이며, 표정은 어떨지 알 수도 없었다. 보지 않아도 이렇게 심장이 뛰는데, 그 얼굴을 보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 됐다고 말하는 대신 저도 모르게 그 등에 이마를 툭 기댄다. 

 

"나, 왠지 못 보겠어……."

 

왠지 엔나는 화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혼란을 느꼈다. 괜히 손이 떨리고, 시선을 못 맞추겠고. 어쨌든 이 예쁘거나 귀여울 광경을 볼 자신이 없었다. 미안해서인지, 그 밖의 이유인지. 그 말을 듣자 루에리가 욱하는 소리를 냈다. 

 

"……장난하는 건가 지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급격히 서늘해진 목소리와 함께 루에리가 엔나의 손에서 빠져나와 몸을 홱 돌렸다. "엔나." 누가 들어도 열받은 목소리다.

 

"입은 게 보고 싶다며?"

"그, 그렇긴 하지만…."

"똑바로 봐라. 네가 입으라고 안 했으면 안 입었을 거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걸."

 

엔나의 시선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 이제 부끄러움을 잊은 쪽은 루에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입어달래서 마음의 고뇌를 누르면서 겨우겨우 몸에 걸쳤더니 나온 대답이 못 보겠다는 말이라면. 엔나는 아래로 내리깐 시선으로 예쁘게 정리된 치맛단을 담고 있었다. 주름진 앞치마, 올라가면 꼭 맞는 옷이 예쁜 핏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귀여워."

"보고 말하지?"

"……그럴 것 같아서 못 보겠어."

 

너무 좋을까 봐. 그래도 되나 싶어서. 여러 이유들이 두서없이 따라붙었지만, 엔나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소리를 시큰둥하게 듣던 루에리가 한걸음 다가왔다.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의 거리. 그 옷을 입는 데 얼마나 심란해했는지 잊은 것처럼 퍽 당당한 태도로, 루에리는 몸을 낮춰 엔나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 봐." 낮게 부르는 소리. 루에리가 자신의 목 아래쪽에 손을 올렸다.

 

"여기도 리본 묶어야 돼." 

 

그 말에 엔나의 시선은 결국 인접한 루에리의 붉은 눈에서 그 손길을 따라 목으로, 그 아래로 떨어졌다. 그 광경 사이에 붉고 풍성한 리본을 묶으면서, 이렇게까지 허락해주는 마음을 느끼면서,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충동으로 바뀌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응  (0) 2025.03.06
[타르밀레] 밀레시안이 옷을 건전하게 입었으면 좋겠어  (0) 2023.02.03
후회로 얼룩진 일곱번째 밤  (0) 2022.12.24

[타르밀레] 밀레시안이 옷을 건전하게 입었으면 좋겠어

Etc.2023. 2. 3. 01:27

 

 

"..."

얇게 떠지는 가는 시선을 느낀 그 밀레시안은 가만히 시선을 굴렸다. 사실, 그 옷을 살때도, 입을때도, 지금의 시선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눈 앞에 다가오면 꼭 이렇게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이번엔 뭐라고 말하면 넘어가주려나. 고민하는 자의 얼굴에 난처한 웃음이 걸리고, 손을 다 덮지도 않은 반장갑을 낀 손가락이 올라와 쇄골을 훤히 드러내는 옷 사이를 살짝 가렸다. 다시 구르는 시선이 녹빛 눈을 마주했다. 그게..

"...역시 좀, 그런가요?"
"...역시 좀 그렇군요."

지긋이 보는 시선을 느끼며 밀레시안이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한두번이 아닌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는데도 한번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그였다. 여성의 몸을 하고있을 때, 훤히 드러난 다리 위를 손으로 쓸며 질투난다고 속삭였던 그 때가 떠오르면.. 미안하면서도, 사실은 그 시선을 꽤 즐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거 들키면 안되겠지. 세드레시아는 제 입술을 꾹 깨물고 손을 내렸다. 웃는 얼굴 대신, 눈꼬리를 떨어뜨려 아쉬운 얼굴을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살짝 손을 내리고, 내린 손으로 그의 장갑낀 손목을 잡았고.

"그렇지만, 예쁘잖아요. 안 그런가요?"

이래저래 굽이 높아져 그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밀레시안은 살짝 다가와 이마가 닿을듯 고개를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굳이 장갑 아래의 손목을 잡는 손길, 벌어진 옷깃 사이에 까맣게 감은 검은 쵸커. 그가 다가오며 느껴지는 체향에 타르라크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이러니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가늘게 뜬 녹빛 눈을 들어 붉은 눈을 마주봤다.

"그래도 좀 자중하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너무..."
"그래도요. 타르라크."

어차피 당신밖에 못 손대는걸. 이정도는 상관없지않아요?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훅 다가온 체향이 귓가에 느껴지는 것도잠시, 그의 손길에 끌려 올라간 손목이 그의 등허리에 닿은 것이 느껴졌다. 훤히 뚫린 등허리의 피부결이 얇은 장갑 아래로 느껴질때, 익숙한 온기가 입가에 와 닿고 속삭였다.

아직도 마음에 안 들어요?

하고.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응  (0) 2025.03.06
[루에밀레] 루에리한테 메이드복을 입히고 싶어  (0) 2023.02.12
후회로 얼룩진 일곱번째 밤  (0) 2022.12.24

후회로 얼룩진 일곱번째 밤

Etc.2022. 12. 24. 00:50

 

 

이렇게 두려웠던 때가 언제였더라.

 

밀레시안은 감각을 더듬었다. 하얀 땅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다가도 천천히 점멸하거나 흔들렸다. 손에 집히는 감각도 선명해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데이르블라는 목소리만 머리 위로 떨궜고, 그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없이 정신이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밀레시안은 알았다. 자신의 속에서 수많은 힘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오르내렸고, 그것들이 속을 쑤시고 부숴갔다. 그 밀레시안의 힘은 더는 그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확신했다. 자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통제권을 이탈해 버린다면, 자신은 여태 만난 그 무엇보다 더 두려운 재앙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힘을 믿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던 밀레시안은 세계를 단숨에 부술 수도 있는 스스로의 힘 앞에서 비로소 공포를 느꼈다. 도무지 돌이킬 수 있는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손에 너무 쉽게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힘이 없는 자는 원인을 모른 채 사라질 것이고, 그나마 대적할 수 있는 이들은 가장 믿었던 자의 맞은편에 서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느낄 배신감과 상처들을, 그리고 그마저 느끼지 못하고 사라질 모든 이를 떠올리면 밀레시안은 수없이 후회하고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후회 속에서 더듬던 기억 속에서 밀레시안은 그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밀레시안 홀로 떠안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던가. 모든 원흉은 신이라고 했던가. 그가 죽어달라고 말했던 목소리가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떠올렸다. 그래, 이상했다. 그렇게까지 이상할 수가 없었다. 그걸 그때에도 알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동의하지 않으며 영웅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었다. 종극에 그와 자신의 운명이 갈릴 것을 알면서도, 함께 나락에 떨어지자는 그의 손을 떼어내고 도리질 한 것은 자신이었다. 밀레시안은 눈앞의 하얀 땅 위에 눈물이 떨어져 적시는 것을 바라봤다. 모든 감정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제가 흘릴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그를 거절하고, 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는데, 영웅으로, 세계의 빛으로 영원히 살아가겠다고 선택한 건 자신이었는데. 그 선택이 결국 지금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평생토록 속으로 갈무리했던 모든 감정이 후회로 이룬 강을 만들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