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로 얼룩진 일곱번째 밤

Etc.2022. 12. 24. 00:50

 

 

이렇게 두려웠던 때가 언제였더라.

 

밀레시안은 감각을 더듬었다. 하얀 땅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다가도 천천히 점멸하거나 흔들렸다. 손에 집히는 감각도 선명해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데이르블라는 목소리만 머리 위로 떨궜고, 그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없이 정신이 어지러운 것을 느꼈다. 밀레시안은 알았다. 자신의 속에서 수많은 힘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오르내렸고, 그것들이 속을 쑤시고 부숴갔다. 그 밀레시안의 힘은 더는 그 자신의 의지를 따르지 않는다. 그는 확신했다. 자신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통제권을 이탈해 버린다면, 자신은 여태 만난 그 무엇보다 더 두려운 재앙이 되어버릴 것이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힘을 믿었기에 두려울 것이 없던 밀레시안은 세계를 단숨에 부술 수도 있는 스스로의 힘 앞에서 비로소 공포를 느꼈다. 도무지 돌이킬 수 있는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손에 너무 쉽게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들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힘이 없는 자는 원인을 모른 채 사라질 것이고, 그나마 대적할 수 있는 이들은 가장 믿었던 자의 맞은편에 서게 될 것이었다. 그들이 느낄 배신감과 상처들을, 그리고 그마저 느끼지 못하고 사라질 모든 이를 떠올리면 밀레시안은 수없이 후회하고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후회 속에서 더듬던 기억 속에서 밀레시안은 그를 떠올렸다

 

모든 것을 밀레시안 홀로 떠안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던가. 모든 원흉은 신이라고 했던가. 그가 죽어달라고 말했던 목소리가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떠올렸다. 그래, 이상했다. 그렇게까지 이상할 수가 없었다. 그걸 그때에도 알고 있었는데, 그런 그에게 동의하지 않으며 영웅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었다. 종극에 그와 자신의 운명이 갈릴 것을 알면서도, 함께 나락에 떨어지자는 그의 손을 떼어내고 도리질 한 것은 자신이었다. 밀레시안은 눈앞의 하얀 땅 위에 눈물이 떨어져 적시는 것을 바라봤다. 모든 감정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제가 흘릴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그를 거절하고, 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는데, 영웅으로, 세계의 빛으로 영원히 살아가겠다고 선택한 건 자신이었는데. 그 선택이 결국 지금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평생토록 속으로 갈무리했던 모든 감정이 후회로 이룬 강을 만들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