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 속의 불협화음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45
*
G24, 2부의 스포일러 수준이 아니라 스크립트 자체와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날조 낭낭해요) 플레이 후 일독을 권합니다.
!! 트리거에 주의하세요 !!
유혈보고싶어서 쓴 글입니다. 가학성/잔인함/고어 위주로 쓰여졌습니다.
그 퀘(제목) 특성상 대응하지 않은 채 상해를 입는 밀레시안(피해자)의 시점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 TMI : 밀레시안이 검은 용기사의 날개를 달고 있습니다.. 왜 쓰냐면.. 보시면 압니다..
최초발행 2020.05.07
폰트수정 2020.05.29
시야가 붉었다.
머리를 맞았던가. 아프진 않은 것을 보니 이전의 상처일 수도 있겠다고, 밀레시안은 태연하게 그지없는 생각을 했다. 데이고, 찢기고, 뚫린 상처가 여러 번 생겼지만,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그와의 싸움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밀레시안은 어느새 다가온 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타오르는 시선. 그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다. 밀레시안의 앞에 서서… 그 밀레시안을 오롯이 시야 안에 담을 때, 그 순간에 무언가 많은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눈을 했다.
기대감. 고양감. 혹은…쾌감. 저렇게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그 단어들을 그에게 입히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자신의 어떤 면들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지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밀레시안은, 그저 존재했기에 존재했을 뿐인데.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위에 실망감을 덧씌운 얼굴을 한 베임네크가 밀레시안을 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 나를 실망하게 하는군, 그대. "
그가 자리에 쓰러질 때마다 숫자를 헤아리던 베임네크는 어느 순간부터는 더는 그 숫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상대가 몇 번씩 생사를 오가는 동안에 한번도 진지하게 검을 뽑지 않았음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그대. 나와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걸 원하지 않나? 내가 이렇게 원하는데…. 슬픈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고, 눈가를, 뺨을, 턱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던 붉은 눈의 밀레시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실망, 하냐고요.
" 대체 내게 무엇을 기대했나요. "
" ……. "
" 베임네크. 내가 당신을…. "
밀레시안의 손이 베임네크의 얼굴에 닿았다. 마주 본 얼굴에 입 모양으로 무어라 속삭이면, 갑옷을 두른 거친 손이 밀레시안의 목을 틀어쥐고 들어 올렸다. 밀레시안의 손이 그 팔을 붙들었지만, 여태 그래왔듯이 그것을 뿌리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대신, 다정히 쓰다듬는 손길만이 있었다.
….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소란스러운 반호르에서도 그 소리는 선명했다. 아무리 영웅이라 불리는 이지만 육체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목이 부러지자 마왕의 손에 으스러져 늘어졌다. 그런 그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베임네크는 억지로 끌어올리던 입꼬리가 더는 제 뜻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만다. 퍽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 어서 일어나, 나의 그대. 나는 그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
끊이지 않는 피와 싸움을 딛고, 그 전쟁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미 모두 손에 넣었다. 강한 자들을 계속 상대한 끝에, 진정한 끝에 도달했다. 이 마왕은 끝의 성취감보다는 지루함을 느끼는 게 먼저였다. 아니, 성취감이 있었긴 했던가? 이후에는 의미가 없었다. 더 이상 제 흥미를 끌 수 있는 어떤 것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포워르의 왕이 되었지만, 아래에 있는 것들은 해를 거듭해도 같은 일들을 반복할 뿐이었다. 닿지 못하고 추락하는 이들. 의지도 없는 이들. 늘어가는 지루함, 기대도 없던 실망감. 그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그 어떤 마왕의 감정도, 의지도. 그 밖의 여남은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공허 속으로 빠져들게 할 만큼 기나긴 삶이.
그 삶에 나타난 것이 그였다. 밀레시안. 끊이지 않는 싸움을 딛고 끝을 모르고 강해지는 자. 죽지 않는 육체를 가진 자. 기우는 세계를 몇 번이나 바로 세우고, 신이 방해물로 여길 정도의 영웅적인 존재. 그를 만나기를, 그와 이렇게 검을 맞대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그와의 전투에서는 제 안에서 감정이 흘러넘치는 기분이었고, 공허라곤 한 줌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보다 열정적으로 죽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던 것. 원하던 전투, 시간. 그 모든 것이었다. 그래, 그런 그에게는 그의 태도에 실망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하기 그지없었다.
" …매정한 그대."
밀레시안은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다고 생각하며 숨을 내뱉었다. 온몸을 감싸던 통증이 물러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베임네크의 얼굴을 시야에 담는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 태도가 이런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약점을 내보인 건 베임네크, 당신인데.
" 당신은 패를 너무 일찍 들켰어요, 발로르. "
" 그래, 그렇군. 내가 너무 힌트를 많이 주었나. "
그대의 앞에서는 이렇게도 마음이 약해져서야. 베임네크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리며 검을 내리꽂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피부가 찢기는 소리. 밀레시안의 삼켜지는 신음이 들렸다. 그렇다면 다른 즐거움이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밀레시안을 내려다보는 베임네크의 눈에 다시 웃음기가 어렸다. 또 모를 일이지. 그의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가까우니, 인간들이 쉽사리 패배하고 마는 지긋지긋한 고통에 가두면 전의를 회복할지.
* 고어에 주의하세요! 신체훼손의 직접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
검이 뚫은 상처에 손을 뻗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피부는 쉽게 갈라져 속을 내보였다. 으스러진 뼛조각, 굵은 혈관들. 죽지 않고 움직이는 살덩어리들. 왈칵 솟구치는 피가 그의 검은 갑옷과 얼굴에 튀었다. 고통에 바르작대던 밀레시안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쥔 것 같았지만 잠깐이었다. 서서히 힘을 잃어간다. 하지만 육체가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다. 벌어진 가슴 사이로 생생하게 뛰는 심장을 눈에 담으며 발로르는 작게 웃었다.
" 생기가 넘쳐. 그대의 얼굴에서는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없었는데. "
" ……. "
" 언제나 그대는 어딘가 통달한 것처럼 보였지. 당연하게 도와달라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 이유마저 그대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어. 그저 운명에 따르는 빈껍데기처럼…. 그런 그대가 나와 다른 것이 있나? "
베임네크의 서늘한 손이 고동하는 심장 위를 쓸고, 손에 쥐었다. 그렇다고 그의 존재를 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질적이로 생동감 넘쳤으므로. 그는 손에 쥔 심장을 들어 올렸다. 이어진 것들이 툭, 툭 끊어지며 피를 쏟았고, 밀레시안은 숨이 멎는 것을 느낀다. 이질적으로 뛰는 자신의 심장을 눈앞에 두고, 베임네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 밀레시안. 그대가 이렇게 심장이 뛴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지 않나. "
마치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베임네크가 중얼댔다. 멈춘 심장 위에 입 맞추고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곧 그는 다시 일어나서 이 고통을 계속할 것이었다.
몇 번이나 숨이 멎었던가. 헤아릴 수 없다. 밀레시안은 자신의 피로 흥건히 젖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던 차에, 몸을 뚫는 격통을 느꼈다. 수십번도 더 뚫리고, 피를 쏟는 몸 위를 베임네크의 몸이 누르고 올라왔다. 심장을 뜯고, 사지를 잘라내고, 목을 비틀고. 또 어땠더라… 지금, 지금은.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낮은 비명이, 신음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핏줄기에 먹혀들었다.
" 그대, 그만 참는 게 어때. 그대가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내 마음이 아플 지경이야. "
응? 나긋한 숨소리가 귓가에, 목덜미에, 어깻죽지에 내려앉았다. 조르듯, 재촉하듯 뱉는 말들이 애처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베임네크의 검은 갑옷에 감긴 손이 밀레시안의 몸 위를 쓸었다. 몇 번을 으스러뜨려도 일어나는, 일어나서 운명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이를. 더듬는 손은 이내 오른쪽 어깻죽지에서 멈춰 섰다. 곧 부러질 것 같은 날개는 그 몸에 뿌리를 내리고, 그 몸에서 흐른 피를 머금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베임네크는 시선을 들어 붉은 눈으로 그 날개를 훑었다. …문을 연 자의 날개인가. 조용히 중얼거리면, 밀레시안이 반응했다.
" ……. "
말을 하지 않았지만 두 존재의 붉은 눈이 마주했고, 베임네크의 눈이 휘어 웃음 지었다. 공허한 눈빛에서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베임네크의 손이 그 날개의 뿌리에 가 닿았다. 손에 힘을 주고, 그 날갯죽지를 뽑아낸다. 투둑, 툭….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 피가 떨어지는 소리. …지고한 영웅의 짧은 비명. 그것이 전부인 짧은 순간이었지만, 베임네크는 오늘 한 행동 중에 그나마 가장 의미 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날개를 잡을 때, 쥐어볼 때, 뽑아내는 모든 순간에 밀레시안은 잘게 반응했다. 고통 안에서도 감정을 숨겼다가, 내비쳤다가, 아주 잠깐은 말리려고 하는 것도 같았다. 날개가 세 개만 있었어도 그가 검을 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베임네크는 비틀린 생각을 했다. 질투 같은 모양을 했다. 수많은 고통을 주어도, 이렇게 간절히 애원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이가, 육체의 고통 외의 것으로 흔들리는 것이. 그렇게 흔들리게 하는 것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라는 것이 이토록 실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를 베어냈다. 말을 못 하는 모양으로. 짓밟고, 죽이고, 숨통을 끊어둔다. 그의 주변에 알 수 없는 빛과 함께 그가 부활하면, 그 아래 불을 피워 태워죽였고, 다시 눈을 뜨면 목을 베고, 다시 눈을 뜨면 사지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고통 속에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은 걸 확신하는데. 그런데도.
" …여유가 없어 보여요, 발로르. "
자신의 목을 쥔 그를 보며 밀레시안이 흐리게 웃었다.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된 사지에서 고통이 일었다.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땅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자에게는 낯설지도 모르는 고통이었다. 일방적인 폭력, 살해. 그 사이사이에 이어진 속삭임들.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숨이 끊어지면 고통이 물러갔고, 이어지면 다시금 닥쳐왔다. 지옥 불에 던져지면 이런 느낌일까. 아득함 속에 밀레시안은 생각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발로르 베임네크는 퍽 슬픈 표정을 했다.
"그대. 이제 그만 포기하고 검을 쥐지 그래."
응? 애처롭기까지한 목소리가 귓가에 앉았다. 이어서 숨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곧 죽겠지. 숨이 끊어지는 순간은 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것이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육체의 고통으로는 밀레시안을 설득해낼 수 없었다. 고통은 언젠가 끝나는 것이었다. 부활하면 그만이었고, 치료하면 그만이었고. 아프던 순간은 길고 많았지만, 그것을 되짚어서 고통이 되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얼마든지 견뎌내면, 견뎌낼 만한 일이었다. 다만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대는 알잖아…나를 이해하지 않나?"
우리는 닮았어. 이 공허가 무엇인지 그대는 알고 있잖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절망적인 목소리였다. 세상의 정상에 선 이의 공허함이 묻어나는 그 말이었다, 자신을 동정해달라고, 이해해달라고. 이해하고 나를 위해 칼을 뽑아달라 간절하게 뱉는 그 말이었다. 우리가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올곧은 세상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이 공허함 대신 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가 말하던 의미 없는 꿈을 떠올리고 만다. 그것을 이뤄줄 수 없다면 그저, 그의 간절함 하나 정도는 이뤄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 만다.
제 목을 쥐고 떨리는 검고, 단단한 손 위를 밀레시안이 쓸었다.
꽤 오랜 시간 전. 수십번 죽어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밀레시안은 끝을 예상했다.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그가 겪은 모든 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세상의 많은 것이 그 손에 달려있다. 그 끝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 세상은 제 곁에 남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늘 잃어왔다. 죽이기도 했고, 손쓸새 없이 놓치기도 했다. 당신이 그 손으로 뽑은 날개는, 내 유일한 오점의 흔적이었다. 지고한 영웅이라고. 그 영웅은 이렇게 실수를, 잘못을 반복하는 이였다. 아마 나는 당신을 죽이게 되겠지. 그것이 실수인지,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인지, 오점인지. 수십번을 되짚으면서 고통받게 되겠지.
또 나는 이렇게 안타까운 꼴을 하는 당신을 구하지 못하고 그것이 최선이었다 위로받겠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왜 이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더라. 왜 당신에게 맞서 싸우지 않았더라. 수십 번을 죽어서인지 무엇 하나 명확하게 보이지 않고 흐려진다. 여지껏 검을 쥔 적 없는 밀레시안은 지금, 이 순간 이제와서야 전의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끝에 말했다. 당신의 손을, 다정히 잡고서는.
" … 미안해요. "
어차피 그때가 올 거라면, 최대한 미루고 싶어. 그게 내 욕심이라도 말이에요.
제 목을 감싼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밀레시안은 뱉지 못한 말을 안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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