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연] 영웅의 조각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4. 00:40

 * 드림주님의 요청을 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 25 2부 이전의 둘이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하고 길고 긴 시간이 지나 현대에 다시 태어났다는 

   설정으로 쓰였습니다. 베임네크는 기억을 가지고 있고, 밀레시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 드림주의 이름 및 모든 것이 언급됩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하게 굳은살이 붙은 손가락 끝에 유려한 선으로 조각된 영웅의 얼굴이 담겼다. 그 앞에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이 오롯이 담긴 듯 머리카락 한 올까지 살아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바람이 불면 날릴 것 같은 생생함이 빛을 받아 반짝이기까지 했다. 그것은 베임네크가 손으로 빚어낸 작품들 중 손에 꼽는 수작이었지만, 그것을 사진 이외의 실물로 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베임네크, 그 혼자만 드나드는 공간에서만 영원할 것처럼 자리하는 것이었다.

 

베임네크는 그와 눈을 맞췄다. 이전의 삶에서도 이렇게 우러러보았던 것 같았다. 시선은 항상 아래에 있어도, 그는 그 어떤 자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자였다. 은은하게 먼 곳을 비춰 어둠을 거둬낸다는 그 새벽별의 명성과도 같게, 세계를 떠받들던 자였다. 불완전하게 끝난 그와 자신의 삶이 끝난 후에, 그 먼 훗날,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던 자신에게 그에 대한 기억이 깃들어버린 후에는 영원토록 그만을 그리며 살아갈 것만 같았다. 모든 기억이 선명했다. 마지막을 속삭이던 목소리도, 입 맞추고 떨어질 때 마주치던 복잡한 감정의 눈빛도. 그와 숨을 섞을 때 느껴지던 온기도. 모든 것이 손에 쥘 듯 선명했지만, 그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그를 잃어 영원토록 그리워할 자신만 있을 뿐.

 

그러니 빚어냈다. 어떻게든 그를 손에 담고 싶어서. 마지막 순간에서야 제게 어떤 감정을 비쳤던 그의 그, 짧았던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놓고 싶은 것처럼. 최대한 마모되지 않고 그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는 것으로. 

 

떠난 자들을 마음 안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이였다. 서늘한 빛을 하고 따듯한 성정을 가진 자였다.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무엇하나 떨쳐내지 못한 채 자신의 길을 가는 자였다. 그 자신의 마음을 함께 도려내야 하더라도, 그렇게 되었더라도 마지막까지 베임네크에게 삶을 끝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주고자 하던 자였다. 베임네크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고 만다. 뜨끈하게 돌아온 체온이 목을 감싸는 것도, 그의 마지막 말도. 그 말을 한 번만 더, 다시 듣고 싶었지만 그는 곁에 없었다. 그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시선이 담긴 밀레시안의 조각상과 베임네크. 그 자신이 있을 뿐.

 

 

 

 

 


 

그 오래 전, 베임네크는 손을 멈췄다. 몸의 힘이 꼬여 세계를 멸망시킬 위기에 있는 그에게는 오히려 끝이 편안한 길임을 아는데도 폭주하는 그에게 칼을 꽂아 넣지 못했다. 그의 손에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불길이 일렁이는 검은 그 아래에 세워진 채였고, 폭주하는 그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를 벨 수 없을 만큼 사랑해서일까. 그렇게라도 한순간이라도 더 그의 곁에 남아있고 싶어서였나. 

 

그를 사랑했다.

 

그로 인한 순간의 선택이 모든 변화를 가져왔다. 베임네크는 자신의 의무를 져버렸다. 비로소 자신의 순서가 왔을 때…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하는 순간에 그러지 못했다. 그러자 세계는 한번 되돌아갔다. 그 선택을 하게 만든 감정은 다른 것이 아닌, 포워르의 옛 왕, 발로르 베임네크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세계의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만, 그가 품은 마음은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계를 되돌리거나 무너지게 하는, 절대적인 애정이며, 사랑이고, 신앙이었다.

 

돌아간 시간에서는 다시금 기회가 있을 줄 알았건만, 다시 찾아온 기회는 밀레시안에 의해 뭉개졌다. 신이 손을 놓아버린, 질서를 잃은 세계 아래에서 밀레시안은 자신의 삶이 종식되기를 선언했으니까. 베임네크의 감정이 흐트러뜨린 일의 대가를 밀레시안이 그 자신의 죽음으로 갚고자 했으니. 

 

"나는… 당신이 걱정돼."

 

흐트러진 사랑 고백보다 더 진하게 남은 기억이 그것이었다. 원하지 않는 멸망을 보고, 모든 것이 종식되는 낭떠러지 앞에 선 자에게서 진심 어린 목소리가 떨어질 때, 그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약속한 마지막을 선사해주기 위해 이 생을 함께 마치자고 이야기했을 때. 베임네크는 그 에린의 어떤 자보다도 기쁘고도, 슬픈 존재가 되어있었다. 갈망하고 원하던 것을 손에 쥐고 끝나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관대하며, 동시에 잔인한 처사인지. 하지만 그 마왕은 가장 바라던 것을 손에 쥐고도 욕심을 버릴 줄을 몰랐다. 그를 손에 쥐고, 입 맞추고, 인사하며, 

 

다음 생에라도 너를 손에 쥘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났다. 전생의 기억이 서서히 스며들어 구체화 된 것은 성인을 갓 넘어서였으니, 따지고 보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를 기다리며 수없이 도는 굴레 위에 있을 때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 그저 작은 인간이 성인이 되는, 아주 짧은 시간. 그러나 그 이후의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과 그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공존했다. 그럴 때마다 베임네크는 조각에 손을 대었다. 그를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쏟아내었다. 섬세하고, 또 찬란한 영웅의 조각은 그렇게 몇번이고 빚어졌고, 새로 빚어질 때마다 선명하게 구체화하였다. 베임네크의 시선과 감정과, 모든 기억을 담아서.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기어이 그보다 남에게 먼저 넘겨주지 못해 학교 안에서 졸업이 계속 유예되었다. 모자람 없는 학점도, 성적도, 평판도 그가 졸업을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 흐름에 나름대로 흘러가듯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학관 입구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그를 마주했을 때는, 눈을 두 번이고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수없이 떠올리던 그 얼굴이었으니. 환경이 다르고, 삶이 달라도 그는 그였다. 성격도, 목소리도, 말도, 그의 삶의 태도마저도 이전의 기연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옛날, 그 과거 어느 날 그랬던 것처럼. 그의 긴 머리칼을 손끝으로 살짝 쓸어올렸고,

 

"나의 그대. 이렇게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었지."

 

그 머리칼에 입 맞췄다. 

 

전생의 기억을 오롯이 가진 베임네크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기억도 없고 그렇기에 자연스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하던 그가 그 날 이후로 시야에서 애써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평생토록 감정을 속 안으로 눌러 참고 한 번 더 참아 갈등을 제 안에서 갈무리해버리던 그가 다음 생이 되어서야  "이 선배 미친 것 같아"하고 솔직하게 표출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베임네크에겐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기쁨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짊어진 부당한 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모습에 기쁨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 그에게 발을 들였다. 낯선 존재에게 낯설다 말하고, 힘든 일은 적당히 제 손에 밀어가면서, 쉬고 싶을 땐 쉬고, 속삭이는 말에 꼬드겨지기도, 강하게 반발하기도 하는 그의 평범함을 마음껏 만끽하고 또 사랑하고, 원했다. 이전의 무엇보다 강인하던 그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혹은 그와 같이.

 

그럼에도 저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하는 순간에는 이전의 그 눈빛이 되살아난다. '당신을 어째야할지 모르겠어' 하는 그런 눈빛이, 시간이, 숨결이 머무는 것이 완전히 이전 삶의 그와 같았다. 그 수많은 전장 위에서 여유라곤 없던, 가라앉은 붉은 눈과 그가 겹쳐 보이곤 했다. 당신이 걱정된다고 했던…그 말도. 그 손길도. 그러면, 그때는 꼭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흔하디 흔한 소설의 구절처럼 존재감을 느끼지도 못했던 심장이 소리를 내며 뛰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안에 들어차고 밖으로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아야 했고, 너를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영원토록 기다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아내어야 했다. 그는 많은 순간 베임네크의 호의에 당황했지만, 베인이 그 속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삼키고 있었는지는 영원히 모를 일이었다. 

 

 

 

 


 

"와. 선배 예술한댔지."

 

어쩌다 그에게 보여준 작품을 보고 당연하게도 그는 그 자신을 조각한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감탄하며 다른 누구도 실물을 보지 못한 베임네크의 가장 아끼는 수작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당연했다. 그것은 영웅인 밀레시안을 조각한 것이었으며, 지금 이곳의 그는 영웅도 무엇도 아닌 그냥 대학생일 뿐이었으니. 베임네크는 손을 뻗어 그의 옆머리를 쓸어넘겼다. 베임네크 자신도 더는 마왕의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 죽음의 기로에서 묶여있지 않으니 너와 나의 체온은 미적지근했고, 우리는 더는 평생의 삶에 묶여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처럼, 혹은 그들보다 훨씬 더 평범한 삶을 살고, 똑같이 나이를 먹고, 비슷하게 죽어갈 자들이었다. 

 

"참 희한한 일이군…"

"음?"

"그대가 단 하나뿐인 존재라 그리 눈길이 가고 호기심이 새며 매듭을 지어줄 존재인 줄로만 알았던 것인데…왜 지금도 이리 사랑스러운지."

"……또 낯뜨거운 소리 한다."

 

눈가를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그의 손을 끌어왔다. 간절하게 잡았던 전생의 어떤 시간처럼, 엄지에 살짝 힘을 줘 누르면 그 굴곡이 낯설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마 무엇보다 낯선 것은 이 미적지근한 온도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온도를 음미하듯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대가 그대이기에 사랑했던 것이기에 그렇겠지. "

 

그대가 밀레시안이나, 영웅이나, 내 소원을 이루어 주는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