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얀] 지겹도록 익숙한 것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29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조용히 식기들이 맞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이후 목소리는 끊긴 지 오래다. 얀은 농도 짙은 기시감을 느낀다. 묘하게 입맛에 맞는 식사.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시선. 그 오래 전, 안개 속에서 맞부딪혔던 와인잔을 떠올린다. 얀이 무언가를 할 때에 베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고기를 자르는 칼끝도, 그 칼을 쥔 손가락도, 음식을 들어 올리는 손목이나 음식을 삼키는 입술까지도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주 오래 전 시간의 안개에 흐려진 첫 만남 때부터 그러했다. 안개 속에서도, 다른 시간대 다른 삶에서 기억이 없을 때마저도.
사랑스럽다는 듯, 혹은 그렇지 않은 듯, 그렇지 않은 것을 가장한 듯. 그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아래의 감정은 읽을 수 없다. 사랑이 오가지 않을 때의 그는 어떠했던가. 자신의 눈에 사랑이 덧씌워져 있는 지금은 그 과거의 기억과 대조해도 다를 것이란 없었다. 그 무엇도 익숙하기 짝이 없고, 익숙한 모든 것을 사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몇번의, 몇십번의, 어쩌면 그보다 더한 셀 수 없는 시간을 윤회하는 동안에도.
사랑하는 것을 잊는다면 그것은 과연 축복인가. 그 물음을 떠올렸다면 소모적인 싸움은 오가지 않았을 텐데. 둘 중 누구도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고통은 눈을 가리고 마음의 여유를 삼켰다. 거대한 바위도 깎아내리는 시간에 인간의 형태를 한 정신이 바스러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기억을, 그 시간을 서로 기대기만 했어도 덜어지던 것들이 각자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저 그것을 깨달으면 되었다.
그 짧은 식사 시간을 붙잡고 늘어지면서도, 왜 그런 것들은 진작 떠올리지 못했을까. 베인은 휩쓸려가 버린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수 없이 괴로워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반려에게 얼마나 많은 거짓을 이야기했던가. 얼마나 많은 이별을 겪었던가. 몇 번의 이별, 몇 번의 재회 속에서도 오직 아르얀로드와 함께 있는 시간만이 유효하게 느껴졌는데.
너무, 너무 오래 헤매었다. 그걸로 충분한데도.
베임네크의 손이 얀의 머리칼을 쓸었다. 절망을 말하던 의식적인 손길과는 대조되는 무의식적인 손길. 얀은 시선을 들지 않아도 그것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손을 뻗을 때 어떤 얼굴인지, 어느 정도의 높이 위에 있는지. 마주 보면 어떻게 웃을지. 어떤 목소리로 말을 걸어올지. 그 말끝에 맺힌 웃음소리까지도. 이 유예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고 끝을 맺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임을 알았다. 어쩐지 숨이 멎을 듯, 숨이 찰 듯 벅찬 마음이 목까지 차오른다.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괜히 퉁명스러운 소리로 내뱉었다.
"치료 중일 때만이라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얌전히 있지 않았나?"
"… 이쪽 팔만 움직였대도, 이쪽 팔을 치료 중이잖아."
팔을 잡아 내린다. 반박하는 목소리 끝에 웃음소리가 걸려있다. 팔을 잡아 내리는 손길에도, 흐트러진 붕대를 보고 있는 눈길까지도 시선이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랑스럽다는 듯, 숨기거나 거짓 없이. 베임네크는 그 시선으로 부족하다는 듯 얀을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인 그의 숨결이 얀의 목덜미에 가 닿았다. 결코 끝나지 않는 시간. 오랜 시간을 넘어 재회한 것만 해도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요란한 심장 소리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제 몸처럼 익숙한 것들이 지겨워지지도 않는다. 비로소 기대어진 두 시간은 겨우 안정을 찾을 것이다.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군."
편안한 숨에 말이 섞였다. 익숙하지 않은 안도감이 익숙한 체온을 타고 번져갔다.
"다시 당신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겠어."
둘은 잊히지 못한 모든 기억 속에서 재회하던 모든 시간을 떠올렸다. 언젠가 다시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해도, 언젠가는 다시 이 안정을 찾을 것이다. 모든 것이 바뀌어도, 당신에 대한 기억과 감정만은 변하지 않으므로. 물감을 발라 접었다 편 것처럼 꼭 닮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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