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연히 스러지는 잔열

마비노기 2차/베인밀레2022. 12. 23. 20:45

 

 

* G25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메인스트림의 플레이를 마치고 일독을 권장합니다.

* 베임네크사랑해이제정말시리즈따로파야한다 

 

 

 

 

 

 


 

 

흐름이 멈춘 세계에서 베임네크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이것이 멈추지 않는 쳇바퀴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적자의 운명을 받고 자신의 쳇바퀴를 멈춰줘야 할 이는 이미 수없이도 포기하거나 실패했고, 덕분에 진작 끊어졌어야 하는 삶은 비슷한 구간을 몇번이고 맴돌았다.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이 꺼졌다가 과거의 전쟁터로 돌아오면, 그 어떤 권태감보다도 깊고 끝없는 공허감이 몰아쳤다. 그 긴 삶을 살아오는 동안 느낀 모든 감정들은 지치고 지쳐 퇴색되어버리곤 했건만 이 공허감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 언제나 그것은 삶에 묶인 마왕을 끝없이 뒤흔들고 삼켜냈다. 삼켜져 좌절할 법도 하건만, 그는 그 공허감으로 말미암아 되려 간절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그 가망 없어 보이는 내기를 붙잡고 매달려 계속해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굴레 속의 어느 날, 그를 만났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했지.

 

무겁고 깊은 계단에 발을 디뎌 내려갔다. 조곤조곤 대화하는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그 모습들이 눈에 밟혔다. 세 사람의 인영. 그중에 유독 검은 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상의 암흑마저 품어버린 것 같은 차분한 검은 빛과 그의 존재감을 선명히 새기는 붉은 빛을 가진 자였다. 테흐두인의 어둠을 뚫고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자신을 마주했을 때, 베임네크는 확신했다.

이 눈부신 자가 바로 자신의 굴레를 끊어줄 구원자임을.

 

 

 

 


 

 

모든 맹약이 거둬졌다. 베임네크는 비로소 자신의 굴레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그것을 해낸 이가 누구인지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 균열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겪어 알면서도 기꺼이 겁 없이도 발을 들이던 그, 밀레시안이겠지. 그렇게 들어와서,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검을 맞대주던 그였다. 수없이 끝을 맺어달라고 말해도, 그 간절함을 비쳐 보여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를 망설이는 자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는 숫자만큼 밀레시안의 숨이 끊어졌다. 대부분은 무기를 들지도 않거나, 중요한 순간에 망설였던 까닭이었다. 밀레시안이 누운 자리에서 다시 눈을 뜰 때. 그의 곁에 칼을 꽂고 내려다보는 베임네크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날 밤이 생각나는군, 그대."

"그래요. 다를 것 없군요."

"하지만 그때처럼 언젠가 끝나지는 않을 거야. 일어나 그대. 검을 쥐어. 끝을 맺을 시간이야."

 

밀레시안은 답하지 않은 채 시선을 들었다.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가 서로에게 멈춘 채 시간이 흘렀다. 가쁜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고 두 사람이 머문 공기를 적막이 지긋이 눌렀다. 그 속에서 차분히 눈을 감은 후 숨을 고르고 다시 눈꺼플을 들어올린 밀레시안이 마른 입술을 열어 말했다.

 

"그날 밤,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요?"

"그대에 관한 일을 내가 잊을 리는 없지. …하지만 그대. 나의 대답도 떠올려줬으면 좋겠는데."

"베임네크."

 

밀레시안은 피로 물든 하얀 손가락으로 그를 밀었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투가 재개되는 것을 알리는 장전 소리가 들리자 베임네크가 땅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날이었다. 붉고, 덥고, 끊임없이 아프기만 한 날이었다. 모든 숨소리에는 밀레시안의 피 냄새가 섞여 있었고, 모든 공격에 피를 보는 것도 오직 그 밀레시안 뿐이었던 그 날. 둘 중 누군가의 밀레시안의 피와 살이 바닥을 구른 덕에 더욱 붉게 물들어가던 반호르의 흙바닥 위. 쉼 없이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며 누군가는 미래를, 누군가는 이룰 수 없는 꿈을 되새기던 날이었다. 시간이 흘러 둘은 다시 마주했다. 모든 밤이 지나갔고, 비로소 끝에 다다른 곳이었다. 이 곳에서 그 날을 떠올렸다. 실린더에 결정을 장전하던 밀레시안이 팔을 내리고, 자신의 맞은편에 선 이를 마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 날, 그 순간 소리로 내지 못하고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던 그 말에 목소리를 실어 내보냈다. 둘 모두의 마음을 짓누르는 말이었다. 자신의 말이 의미없음을 아는 자가, 이 말에 서운함을 품을 자에게.

 

"내가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요."

"이전과 같은 답을 해 주지, …나의 그대."

 

베임네크는 눈꼬리를 떨어뜨리면 퍽 서운한듯 말했다. 그리고 도약했다.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이의 검을 가드실린더로 막아낸 밀레시안의 실린더에서 응축된 불꽃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폭발해 두 사람을 밀어냈다. 그 날과 같았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로 베임네크는 밀레시안을 몰아붙였다. 몇번의 폭음과 검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서야 베임네크가 입을 열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

"그 실낱같은 기대는 충족되지 않아. 그대… 부디."

 

끝을 맺어 줘. 그것이 입 밖에 나오는 말은 아니었지만, 밀레시안이 그 뜻을 읽기엔 충분했다. 그의 질리도록 긴 삶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알게 되었으니까. 그의 표정이 그 멈추지 않는 쳇바퀴 위에서 나오는 것을 알았고, 그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듯 빛나는 밀레시안을 끝으로써도, 시작으로서도, 혹은 그 삶의 가장 찬란한 빛으로써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끝을 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며 찬란한 것인지... 이제는 정말로 공감한다 말할 수 있었으니.

 

두 사람이 다시 밀려났고. 몇번을 다시 부딪혔다. 바닥에서 화염이 끓어오르고 구름이 멈춘 하늘에서도 번개가 쏟아져 내렸다. 그의 타오르는 눈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밀레시안은 자신이 바란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수없이도 봐온 눈빛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마주한 밀레시안이 한 순간도 체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죽기를 바란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밀레시안이 놓친 많은 이들 중 그 밀레시안이 누군가를 죽여 나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심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었다. 

 

… 그런데도, 그 순간 자신의 끝을 확신했다.

 

그들 모두가 그랬고, 눈앞의 베임네크가 그랬다. 너무도 익숙한 눈빛이었으며, 너무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마주 본던 눈빛과 열기가 훅 가까워지며 날카로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붉은 눈이 닿을 거리에서 마주쳤다. 굉음이 물러가고, 서로에게 대치하는 힘을 남긴 채로 서로의 시선에 오롯이 서로만이 담겼다. 서로를 이따금 덮곤 하던 먼지와 안개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한 줌씩 먹히는 듯 가라앉았고, 검과 방패를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시선과 함께 숨소리가 섞였다. 그 숨소리마저 가라앉을 때 즈음, 거대한 인영이 쓰러졌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래요."

"……."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쓰러진 자의 앞에 선 밀레시안이 가만히 눈을 내리감고 심호흡을 했다. 수많은 것이 속에서 끓어올라 넘쳐흐를 것만 같다고 느꼈다. 이런 끝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가. 한편으로는 확신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해오는 시간을 얼마나 오랫동안 가졌던가. 그는 죽을 것이다. 세계는 그렇게 흘러왔으므로. 자신은 수많은 이를 죽이거나 잃어가며 여기까지 도달했으므로. …또한, 그에게 그것이 진정한 구원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래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하하…"

 

끈질기게도 서로를 마주하던 시선들이 흐트러졌다. 수많은 감정이 뭉쳐 쏟아질 것만 같았고, 터져버릴 것 같았으며, 죽을 때까지 그 곳에 머물며 가슴을 누르고 있을 것 같기도 한. 이 순간이 마지막임에도, 마지막이라서 뱉어낼 수 없는 것들이 각자의 마음에서 조용히 침잠했다. 그 끝에 베임네크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밀레시안을 눈에 담았다. 자신의 운명을 무엇보다 확신하고 오래도록 그것을 준비해 오면서도, 운명을 거스를 준비 역시 차고 넘치게 하던 자. 버려질 선택지임을 확신하면서도 모든 것을 끌어안는 자였다. 그것이 영원토록 불가능하거나 나아갈 수 없게 무겁거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는 자였다. 그것이 그 스스로를 수없이 깎아내린 경험을 해왔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였다. 이 땅의 무엇보다 고결한 존재여, 

 

"그대는… 너무나도 눈부시군."

 

밀레시안이 그를 내려다봤다. 손을 뻗어 그의 검을 쥐면, 천천히 손이 풀리고 그 검이 손에 쥐어졌다. 놀랍도록 무거운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의 삶을, 미련을, 모든 의미들을 담은 것이었으므로. 공허하던 모든 것을 끊어낼 검이었다. 그의 체온처럼 차디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무게가 버거운 것처럼 팔이 떨렸다. 두려운 것처럼 숨이 흐트러졌다. 

 

모든 것이 끝날 것임을 알았다. 그 순간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자, 우리의 여정을 끌어온 그의 가장 간절한 순간이었다. 수없이 되새겼다. 세계를 위한 것이며, 그를 위한 것이고, 가장 올바른 길이었다고. 그러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침묵이 흘렀다. 베임네크는 검을 들며 감겼던 상대의 눈이 다시 자신의 시선을 마주한 것을 보았다. 오롯이 자신에게 담기는, 오롯이 자신을 담는 눈동자를. 비로소, 지금. 말로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을 담은 슬픔이 제 앞에 떨어지는 것을. 당신을 잃기 싫다는 인간적인 욕망을 종극이 되어서야 쏟아내는 존재를. 어떤 신들보다 단단하고 굵은 모습으로 그 스스로를 단단히 잠그고, 자신보다도 타인에 대해 말하던 존재가, 

 

"나는… 못하겠어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밀레시안은 지금 순간을 후회할 것임을 알았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사라져가는 그를 보며 이번에도 실낱같은 희망은 거짓이었으며 허황한 꿈이었음을 알았다. 주저앉아 그를 마주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눈가를 서늘한 손이 천천히 쓸었다. 그 감각마저 흐릿했고 마주 보는 눈빛 역시 주변의 안개에 삼켜져 감에도 베인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눈에 담겼다. 그리고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하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군……."

 

흩어지는 검은 안개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눈에 담았다.

스러지는 잔열 위로 후회 섞인 감정이 방울져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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